초명은 장운봉, 해방 후에 장덕(張德)으로 개명하였다. 서울 출신의 한국화가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로부터 그림을 배웠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6번 입선하였다. 1933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여 3년간 일본화를 연구하였으며 귀국 후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진 뒤 목포로 이주하였다. 1946년 한국예술협회 목포지부를 창설하였으며 1950년 대한미술협회 창설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66년에는 예총 목포지부장에 추대되었고, 1972년 목포시민상을 받았다.
1920년대 후반 김은호의 화숙인 낙청헌(洛淸軒)에서 그림을 배웠다. 1935년 낙청헌 제자들이 조직한 후소회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태평로 조선실업구락부에서 열린 제1회 후소회전을 시작으로 1941년까지 참여하였다.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야포(野圃)」로 입선하였는데, 김용준은 1930년 중외일보(中外日報)에 쓴 「제9회 미전과 조선화단」에서 “예민한 감각을 가지 필치다. 바위돌을 실패하지 않았던들 훌륭한 작품이 될 걸 그랬다.” 라 평하였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귀국한 후 1936년 선전에 「교외만추(郊外晩秋)」로 입선하였다. 한편 1931년 10월 16일부터 25일까지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린 제11회 서화협회전에서 「어린 양」으로 특선을 차지했다.
1930년대 후반 전남 목포로 이주하였으며 해방 이후 장덕(張德)으로 개명하였다. 해방을 맞이하여 작가는 호분을 쓰는 공필 채색화를 버리고 수묵을 사용한 화훼나 기명절지, 화조화를 주로 그렸다. 1962년 5월 23일에 동화백화점 내에 있는 동화화랑(東和畵廊)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입상작으로는 「야포(野圃)」(제9회, 1930년, 입선), 「토(兎)」(제10회, 1931년, 입선), 「한정(閑庭)」(제11회, 1932년, 입선), 「여수(旅愁)」(제12회, 1933년, 입선), 「교외만추(郊外晩秋)」(제15회, 1936년, 입선), 「자수(子守)」(제20회, 1941년, 입선) 등이 있다. 서화협회전에서는 제11회 「어린 양」으로 특선했으며 제14회에서 입상하였다.
1972년에 ‘목포시민의 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