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년(순조 33)에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당시 훼철되었다가 1961년 복설(復設)하면서 봉남서원(鳳南書院)으로 불렀다. 1986년에 재건하였다.
원래 대평면 마동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에 훼철되었다. 1961년에 후손들이 남성동 진주성 내 북장대 아래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사당인 경덕사(景德祠)와 강당인 정교당(正敎堂), 외삼문인 창제문(蹌濟門)을 건립하여 봉남서원이란 명칭으로 그 맥을 이어왔다.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숭은사(崇恩祠)와 전사청(典祀廳)을 재건하여 다시 옛날 명호인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였다. 1961년 정신열을 경덕사에 봉안할 당시 봉안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1978)이 지었다.
경내의 서쪽 경덕사에는 은열공 정신열의 위패를, 동쪽 숭은사에는 문충공 정천익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향하고 있다. 정신열은 호가 관정(官亭)이며, 시호는 은열(殷烈)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으며 거란의 난을 물리친 공을 인정받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정천익은 호가 퇴헌(退軒),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공민왕 때 판부사를 지내고, 1363년(공민왕 12)에 치사관(致仕官)이 되어 단성 사월리 고택에 돌아왔다. 1364년 봄 사위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온 목면 종자를 심어 3년간의 노력 끝에 재배법을 터득하여 종자를 널리 보급하였다. 씨를 뽑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물레[繅絲車]를 모두 정천익이 창제했다.
진양정씨 문중서원의 성격을 지닌 청계서원은 1961년 이래로 약 20여 년간 봉계서원으로 불렸다. 서원의 건물은 사당·강당·고직사(庫直舍) 영역으로 크게 구분되며,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를 지닌다. 외삼문인 창제문을 들어서면 정면 6칸의 강당인 정교당이 정면에 나타나는데, 이 마당의 좌우측에는 비석을 2개 배치하였다.
강당의 좌측은 경덕사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강당의 우측은 정면 3칸의 고직사가 있고, 그 뒤로 내삼문인 혜민문(惠民門)을 지나면 다시 정면 3칸의 숭은사라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정문에 걸어 놓은 청계서원 현판과 숭은사 현판, 혜민문 현판은 모두 후손인 정창훈이 쓰고 제작하여 걸은 것이다. 이외에도 1961년에 후손 정순석(鄭順錫), 정태호(鄭台鎬), 정재화(鄭載華)가 찬한 시가 걸려있다.
조선 후기 문중 사우에서 문중 서원으로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