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순(柳永詢)
이듬해 병조참지로 기용되어 해서(海西)·관서(關西) 사이의 관문인 평산산성(平山山城)의 중요성을 들어 그 수축을 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란 중 부친과 형을 잃고, 김시헌(金時獻)·송순(宋詢) 등과 함께 사사로이 군량·무기 등을 준비하고 장정 700명을 모아 복수군(復讐軍)을 조직, 서울의 수성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598년에 다시 황해도관찰사, 1601년 성주목사, 이듬해 좌승지를 역임하고, 1604년에는 정평부사(定平府使)가 되어 학교를 세우고 스스로 학동들을 가르쳤다. 1606년에 경상도관찰사, 이듬해 동지중추부사·한성부윤에 이어서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