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는 구황어사(救荒御使)라는 명칭으로 확인되며, 조선 후기에는 진휼어사(賑恤御使)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숙종 때부터 ‘감진어사’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영조 때 이후에는 ‘위유(慰諭)’라는 명칭이 붙어 위유감진어사, 위유어사, 위유사 등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감진어사로 명칭이 바뀌기 이전의 진휼어사는 도내(道內)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진휼 상황을 살피고, 현장에서 굶주린 백성을 직접 구제하기도 하였다. 반면, 숙종 때 감진어사로 명칭이 바뀐 뒤에는, 직접적인 진휼보다는 관리 · 감독하는 역할이 강조되었으며 지방 감사의 진휼 업무를 보완하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감진어사는 중앙과 파견 지역을 오가며 감사가 확보한 진휼곡 이외에 추가로 필요한 진휼곡을 마련하여 보급해 주는 권한과 역할을 가졌다. 『승정원일기』 숙종 44년 1월 4일의 기록을 보면 숙종은 “어사가 감진(監賑)의 책임을 맡아 곡물을 청하여 얻으려 함은 마땅하다.”라고 하여, 감진어사의 진휼곡 요청을 핵심적 역할로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