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진어사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후기, 기근이 들었을 때 지방관의 진휼 상황을 관리 · 감독하기 위하여 파견된 왕의 특명 사신.
이칭
이칭
구황어사(救荒御使), 진휼어사(賑恤御使), 위유감진어사(慰諭監賑御使), 위유어사(慰諭御使), 위유사(慰諭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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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감진어사는 조선시대 기근이 들었을 때 지방관의 진휼 상황을 관리·감독하기 위하여 파견된 왕의 특명 사신이다. 감진어사는 중앙과 파견 지역을 오가며 감사가 확보한 진휼곡 이외에 추가로 필요한 진휼곡을 마련하여 보급해 주는 권한과 역할을 가지고, 지방 감사의 진휼 업무를 보완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기근이 들었을 때 지방관의 진휼 상황을 관리 · 감독하기 위하여 파견된 왕의 특명 사신.
어사 파견의 목적

조선시대에는 지방에서 생활하는 백성의 생활상을 살피기 위하여 행대어사(行臺御史), 암행어사(暗行御史), 감진어사 등의 특명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중 감진어사는 지방관의 진휼(賑恤) 상황을 관리 · 감독하기 위하여 파견된 어사로, 특정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별견어사(別遣御使)에 해당된다. 그 주요 파견 목적은 지방관의 진휼 능력을 조사하여 살피는 것과 민생을 살피는 조정의 덕의(德意)를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감진어사의 명칭 변화와 활동

조선 전기에는 구황어사(救荒御使)라는 명칭으로 확인되며, 조선 후기에는 진휼어사(賑恤御使)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숙종 때부터 ‘감진어사’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영조 때 이후에는 ‘위유(慰諭)’라는 명칭이 붙어 위유감진어사, 위유어사, 위유사 등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감진어사로 명칭이 바뀌기 이전의 진휼어사는 도내(道內)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진휼 상황을 살피고, 현장에서 굶주린 백성을 직접 구제하기도 하였다. 반면, 숙종 때 감진어사로 명칭이 바뀐 뒤에는, 직접적인 진휼보다는 관리 · 감독하는 역할이 강조되었으며 지방 감사의 진휼 업무를 보완하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감진어사는 중앙과 파견 지역을 오가며 감사가 확보한 진휼곡 이외에 추가로 필요한 진휼곡을 마련하여 보급해 주는 권한과 역할을 가졌다. 『승정원일기』 숙종 44년 1월 4일의 기록을 보면 숙종은 “어사가 감진(監賑)의 책임을 맡아 곡물을 청하여 얻으려 함은 마땅하다.”라고 하여, 감진어사의 진휼곡 요청을 핵심적 역할로 인정하였다.

의의 및 평가

감진어사로의 명칭 변화와 역할 변화는, 당시 지방에서 재해 행정의 운영이 감사수령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었던 추세와 관련된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이후 영조 때에 위유어사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에서도 진휼 행정에 대한 어사의 직접적인 권한을 축소하고 조정의 덕의을 전달하는 역할을 더 강조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자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논문

원재영, 「17~18세기 재해행정과 어사의 역할」(『한국문화』 7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원재영, 「조선후기 황정 연구」(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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