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사지만 남아 있다. 7세기경에 이 지역에 정착하여 살던 고구려계통의 이주민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세 군데의 토단(土壇)으로 보아서, 당시의 가람은 동쪽을 향하여 서쪽에 있는 금당(金堂) 앞에 탑이 있었고, 탑의 북쪽으로 강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금당이 동쪽, 5층탑이 서쪽에 위치한 호류사[法隆寺]와는 반대이며, 준공과 함께 고구려의 승려 혜자(慧慈)와 백제의 승려 혜총(慧聰)을 맞아들인 아스카사[飛鳥寺]와는 동일한 가람배치법을 취하고 있다.
이 절터는 1938년 발굴조사에 착수하였는데, 당시 출토된 유물은 충청남도 부여에서 많이 출토된 것과 모양이 비슷한 꽃무늬기와와 치미(鴟尾)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 절터가 있는 소라쿠에는 최근 재일교포들이 창건한 고려사(高麗寺)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