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로는 히네진자라고 하며, 일명 오이세키명신[大井關明神] 또는 오이세키신사[大井堰神社]라고도 한다. 현재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신은 우카야후키아에즈[鵜茅葺不合尊]와 다마요리히메[玉依姬命]로 되어 있다. 이 신사의 창건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10세기 초엽의 문헌인 『엔기식[延喜式]』에 그 이름이 보이는 매우 유서 깊은 신사이다.
그리고 1289년에 성립된 「이즈미국신명장[和泉國神名帳]」에는 이 신사가 정사위하(正四位下)로 추서된 신사로 되어 있어 신앙적으로도 상당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센슈지[泉州志]」에 의하면 이 신사는 쇼무왕[聖武王] 때 현재 사카이시[堺市]에 있는 오토리신사[大烏神社]에서 아마테라스대신[天照大神]의 화신인 신봉(神鳳)을 이곳에 불러서 모신 것이 이 신사의 유래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견해는 이와는 달리 고대에 이 지역을 본거지로 삼고 활약했던 신라 계통의 이주 씨족인 히네노미야쓰코[日根造]의 조상신을 모신 곳이 바로 이 신사라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신사는 이 곳에 이주 정착한 히네노미야쓰코를 대표로 하는 신라인들에 의해 건립되었음에 틀림없다.
히네노미야쓰코는 그의 시조가 오시후오미[億斯富使主]라는 자인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도 분명히 신라인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사는 1353년에 전란을 입어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그로부터 2년 후 각호아사리(覺豪阿闍梨)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585년에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기슈[紀州]를 공격할 때 다시 전화(戰禍)를 입어 일시 쇠퇴하였다.
그 뒤 1600년에 도요토미에 의해 또다시 재건되었다. 또, 1813년에는 이 신사의 신앙권이 확대되어 히네노뿐만 아니라 가미노고[上之鄕] · 나가타키[長瀧] · 우사이다[兎田]라는 인근 지역민의 신앙도 총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신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의 주축 세력인 미야사[宮座]를 할 수 있는 집안도 한정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신사의 미야사라는 직책은 한정된 집안에 의하여 대대로 상속되었는데, 그 주체는 이 지역의 남자였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집에서 아들이 없어 외부에서 양자를 받아들였을 경우 그 미야사라는 직책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양자를 같은 미야사의 집안에서 받아들이면 그 자격은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이 신에 대한 제사권은 이 지역의 토박이 남자들에 의하여 계승,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제일은 매년 5월 8일로 되어 있다. 또, 과거에는 신불습합(神佛習合)으로 말미암아 이 신사도 같은 지역의 시겐원[慈眼院]이라는 불교 사찰과 한 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메이지(明治) 초기에 신불(神佛)의 분리정책으로 말미암아 현재와 같이 분리되었다. 「사전(社傳)」에 의하면 당시 시겐원의 승려들도 신사의 행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신주(神主)의 역할도 맡아서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당우로는 본전(本殿)을 비롯하여 1908년 이 신사에 합쳐진 히메신사[比賣神社] 등이 있다. 1600년대에 건립되었다는 본전이 현재 오사카부의 문화유산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