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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궁중의식에서 연주되던 군악 계통의 악기 편성을 가리키는 국악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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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궁중의식에서 연주되던 군악 계통의 악기 편성을 가리키는 국악용어.
내용

삼국시대에 중국 한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전래된 것으로 주로 관악기와 타악기로 편성되며, 궁중의 각종 의식, 국왕의 거둥이나 귀족의 행차 또는 큰 제향이 거행될 때 사용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쳤다. 고취의 역사적인 변천은 고고학자료 및 문헌에 따라서 시대별로 개관할 수 있다.

초기부터 낙랑과 인접하였던 고구려에 고취가 있었던 사실은 ≪삼국사기≫와 안악 제3호고분의 벽화에서 확인된다. 고구려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자명고(自鳴鼓)와 자명각(自鳴角)은 북 종류의 타악기와 관악기의 일종이었다.

이러한 군대용 북과 나발이 고구려와 신라에서 모두 사용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603년(영양왕 14)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신라를 공격할 때 신라군이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면서 대항한 사실이나,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백제의 패잔병을 격파할 때 신라 군사가 깃발을 날리고 북을 울리면서 공격했다는 사실이 바로 옛 고취의 실례라고 하겠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행차할 때 사용된 고취의 모습은 안악 제3호고분의 벽화에서 볼 수 있다. 357년(고국원왕 27)에 건축된 이 고분의 벽화에 기마악대(騎馬樂隊)의 그림이 전하는데, 기마악대에서 사용한 악기들은 고(鼓), 소(簫), 가(笳) 또는 각(角), 요(鐃)의 네 가지였다.

4세기 당시 고취 편성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 네 악기들은, 한나라의 황문고취(黃門鼓吹)와 함께 군악 계통에 드는 단소요가(短簫鐃歌)라는 고취의 악기들과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고구려에서 고취가 군악으로서뿐만 아니라, 높은 신분의 사람이 행차할 때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에서는 고취가 군악과 행차 이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도 사용되었음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발견된다.

4세기경 고구려에서 왕이나 귀족이 행차할 때도 고취가 연주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 신라에서도 그러한 고취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통일 직후인 673년 김유신이 79세로 세상을 떠나자 장례 때 쓰도록 문무왕이 군악고취 100인을 보내 준 사실이 그러한 추정을 할 수 있는 근거이며, 더 나아가서 통일신라시대에도 신라 고취의 전통이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궁중에서 고취가 사용된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여러 궁중의식과 국왕의 행차 때 일정한 의식을 갖추는 위장(衛仗)과 노부(鹵簿)라는 것이다.

고취가 사용된 경우는 원구(圜丘:동지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선농(先農)·태묘(太廟)의 제향에 참석하고 국왕이 환궁할 때, 중국 사신에게서 조서(詔書)를 받을 때, 원자(元子)의 탄생을 알리는 국왕의 조서를 내릴 때, 왕태자비를 들이는 국왕의 조서를 내릴 때, 공주를 시집보내는 조서를 내릴 때, 중국에 표전(表箋)을 올릴 때, 노인을 위한 잔치를 베풀거나 죄인을 사면할 때, 출정했던 군대가 개선할 때였다.

개선하는 군사를 국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맞이할 때의 고취연주를 보면, 원수는 자기 병위(兵衛)의 고취악대를 이끌고 개선악을 울리면서 좌우 2부로 나누어 차례로 연주하도록 하였고, 궁성 정문[光化門]에 이르러 고취 연주가 그친다고 하였다.

의종 때 정비된 위장과 노부는 의식의 성격이나 규모에 따라서 여러 종류로 구분되었다. 가장 큰 규모의 의식을 법가위장(法駕衛仗), 연등회(燃燈會)에 거동하기 위한 의식을 연등위장, 그리고 팔관회(八關會)에 행차하기 위한 의식을 팔관위장이라고 하였다. 노부도 의식의 성격에 따라서 법가노부·팔관노부·선사노부(宣赦鹵簿)·연등노부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때, 고취의 편성형태는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법가위장의 경우 고취의 편성은 여러 대의 수레 앞을 따르는 취각군사(吹角軍士) 20인과 수레 뒤를 따르는 취라군사(吹螺軍士) 24인으로 구성되었고, 연등위장의 경우는 취각군사 16인과 취라군사 24인으로 편성되었으며, 팔관위장의 경우는 취각군사 30인과 취라군사 30인으로 구성되었다.

위장의식에 참여한 취각군사나 취라군사는 명칭이 말하는 대로 관악기를 연주하는 군사들로 보이며, 고려의 왕립 음악기관인 대악서(大樂署)나 관현방(管絃房)의 악공들이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들은 주로 행진 계통의 음악을 담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노부의식에서 연주되었던 고취의 편성은 위장의 경우와 약간 다른데, 법가노부의 경우 놋쇠로 만든 징 종류의 금정(金鉦) 10인, 둘러메고 가면서 치는 북 종류의 강고(掆鼓) 10인, 특수형태의 북 종류인 도고(鼗鼓) 20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북 종류의 여러 타악기를 연주한 사람들은 위장의 경우처럼 군사들이었으리라고 추정되며, 노부의 고취도 역시 행진 계통의 군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사≫ 여복지에 기록된 여러 노부에 포함된 고취의 편성은 [표 1]과 같다.

고려시대 고취의 전통은 조선 초기에 와서 새로운 악기들이 노부의식에 첨가되는 등의 변천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고취는 고려시대처럼 궁중의식에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했기 때문에 ≪세종실록≫ 권132와 ≪악학궤범≫ 권2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 고취의 악기 편성은 방향(方響) 4인, 화(和) 2인, 생(笙) 2인, 노래[歌] 8인, 비파(琵琶) 8인, 피리[觱篥] 6인, 우(竽) 2인, 월금(月琴) 2인, 적(笛) 6인, 퉁소[洞簫] 4인, 거문고[玄琴] 2인, 가얏고[伽倻琴] 2인, 대적(大笛) 6인, 향피리[鄕觱篥] 4인, 아쟁(牙箏) 2인, 대쟁(大箏) 2인, 해금(奚琴) 2인, 장구[杖鼓] 20인 등 총 84인으로 [그림 1] 과 같이 구성되었다.[그림 1] 에서 악기 편성은 전정(殿庭)에 진열된 악현인데, 노부와 전부고취 및 후부고취의 악기 편성과도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 고취악현의 특징은 방향·당비파·월금 같은 당악기와 거문고·가얏고·향피리 같은 향악기가 함께 편성되었다는 점이다. 세종 때의 것을 전승한 성종 때의 고취는 전정고취·전후고취·전부고취·후부고취의 네 가지로 나누어 ≪악학궤범≫ 권2에 기록되어 있다.

성종 때의 전정고취는 악사 2인과 악공 50인으로 구성되었고, 전후고취는 악사 1인과 악공 18인으로, 또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악사 1인과 악공 50인으로 각각 편성되었다.

전정고취는 조참(朝參:한 달에 네 번씩 政殿에 나와 왕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던 일)·문과전시(文科殿試)·생원진사합동방방(生員進士合同放榜)·배표(拜表:왕이 중국 황제의 표문을 받던 의식)와 배전(拜箋)의 권정례(權停禮:절차를 다 밟지 않고 진행하는 의식)에서 연주되었고, 전후고취는 왕의 출궁과 환궁 때 연주되었다.

또한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왕이 가마[輿]를 타고 궁에서 나와 가마에서 내려 연(輦)을 탈 때 연주를 시작하여 왕이 연에서 내려 입차할 때 연주를 그쳤으며, 환궁할 때는 연에서 내려 가마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연주를 그쳤다.

≪악학궤범≫ 권2에 전하는 전부고취의 악기편성은 [그림 2] 와 같다.

조선 초기 고취의 종류는 고려의 것에 비해 다양하였고, 쓰임새에 따라 악기 편성이 약간씩 달랐지만, 관악기·타악기·현악기로 고루 구성되었으며, 그 규모 역시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현악기가 고취 편성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조선 전기 고취의 특징이라고 하겠는데, 이런 고취의 전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전까지 전승되었다.

양대 전란을 겪은 이후 고취의 전통은 아악·당악·향악의 경우처럼 역사적인 변천과정을 거치게 되었는데, 악공의 수가 줄어들었고, 악기 편성이 달라진 점에서 고취의 변천을 찾을 수 있다.

1643년(인조 21)의 기록에 의하면 전후고취를 제외한 악공의 수는 줄어들었고, 악사가 집박전악(執拍典樂)으로 대치되었음을 [표 2]를 통해 알 수 있다.

인조 때 고취의 전통은 한 세기 반 가량 이후인 정조 때까지 또다시 역사적인 변천과정을 거쳤다. 전정고취에 나타난 고취의 역사적 변천은 [표 3]에서처럼, 첫째 향비파·가얏고·거문고·대쟁·아쟁·월금·대고(大鼓)가 사라진 점, 둘째 교방고가 새로 추가된 사실, 그리고 악공의 감소를 들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재정비된 고취의 전통은 축소과정을 거치면서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는데,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취의 축소과정에서 현악기가 제외되면서 관악기 위주로 편성되었다는 사실도 조선 후기의 그러한 음악사적인 대세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취의 명맥은 대한제국을 거치면서도 끊이지 않고 이른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와 국립국악원에서 전승되고 있는데, <보허자>와 <여민락> 같은 음악에서 고취의 옛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
『악학궤범』
『한국음악서설』(이혜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7)
『한국음악통사』(송방송, 일조각,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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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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