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음악의 연주 및 교습에 관련된 기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일명 악공(樂工)이라고 하였고, 고려 때 공인과 더불어 영인(伶人)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공인의 개념은 조선 건국 초기 이후 음악기관이 정비됨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으나, 대체로 악공과 악생(樂生)의 총칭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건국 초 음악인들이 관련되었던 기관들은 아악서(雅樂署)·전악서(典樂署)·관습도감(慣習都監)·악학(樂學)·봉상시(奉常寺) 등이었으며, 당시 음악인들은 악공·공인·재랑(齋郎)·무공(武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 맡은 바 임무 및 소속기관에 따라서 교방공인(敎坊工人) 또는 악학공인이라고 호칭되기도 하였다.
교방공인은 관습도감에 소속된 음악인으로 회례(會禮)와 같은 외연(外宴)에서 향악과 당악(唐樂)을 담당하였으며, 악학공인은 아악서나 봉상시 등 다른 기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악학의 관리들에 의해 취재(取才) 및 습악(習樂)의 감독을 받았던 음악인을 일컫는다.
무공과 재랑은 악공처럼 직업적인 음악인들이 아닌 사람들로 이조나 병조에서 차출된 나이 어린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나라에서 연주행사가 있을 동안 관습도감과 봉상시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노래와 춤을 담당하였다. 아악서의 악공은 제향(祭享)에서 연주되는 아악을 전적으로 담당하였고, 전악서 소속의 악공은 주로 궁중의 잔치 때 향악과 당악 연주를 맡았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아악서와 전악서가 장악서(掌樂署)로 통합되고, 관습도감과 악학이 악학도감(樂學都監)으로 합치게 되었으며, 1466년 다시 장악서와 악학도감이 장악서로 통합되어 장악원으로 개칭될 때, 모든 음악활동은 장악원의 이름 아래 정비된 악공과 악생에 의해서 관장되었다.
또한 공인의 개념도 악공과 악생의 총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조선 중기와 후기까지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