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관현맹인이라고도 한다. 언제부터 음악기관에 소속되어 음악을 연주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 초기 세종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 관습도감의 사(使)였던 박연(朴堧)이 세종에게 그들의 직업을 장려해 줄 것을 상소한 바 있다. 결국, 그의 상소가 윤허됨에 따라 나이 어린 소경을 뽑아 전악서(典樂署)의 계위(階位)에 맞추어 1, 2인씩을 증원하여 사계절에 쌀을 주게 되었고, 관습도감의 관현맹인 가운데 직책을 받지 못한 천인 출신들은 천구수직(賤口受職)의 전례대로 유품(流品) 이외의 잡직에 채용하도록 예조가 조처를 하였다.
그 때 관습도감 소속의 관현맹인은 양인 출신과 천민 출신으로 구분되었으며, 연주하는 음악에 따라 향악 관현맹과 당악 관현맹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궁중잔치 가운데 왕비나 공주를 위한 내연에서 여기(女妓)들의 춤과 노래를 관현으로 반주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1447년 4월 창기들 자신이 관현을 익히게 됨으로써 관현맹의 임무를 넉넉히 대신할 수 있게 되자 일시적으로 남자 관현맹을 없애 버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관현맹인의 전통은 관습도감이 1457년(세조 3) 악학도감으로 통합되고, 후에 장악원으로 흡수된 이후에도 계속 전승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현맹인은 장악원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다만 잡직인 종9품의 부전성(副典聲) 20인 중에서 관현맹 4인의 체아직(遞兒職:현직을 내놓은 문무관에게 주는 벼슬. 녹봉만 주고 실무는 없음)이 명기되었을 뿐이다. 천민 출신인 관현맹인의 잡직은 종6품인 부전악(副典樂)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이들의 직책은 모두 체아직으로서 장악원이 1년에 네 차례 이조에 추천서를 올려서 사령서(辭令書)를 받음으로써 유지되었다.
이렇게 전승된 관현맹의 전통은 장악원에서 커다란 변천 없이 전승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약간의 변천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을 겪은 직후 관아의 기구를 축소할 때 장악원의 관현맹과 관상감(觀象監)의 명과맹인(命課盲人)을 폐지했기 때문에, 관현맹의 전통이 잠시 끊겼다가 1651년(효종 2) 7월 장악원의 첩정(牒呈)에 의해 부활되었다.
그러나 나라의 재정 사정이 어려웠던 까닭에 기아로 헤매기도 하였으나, 영조 때 이르러 장악원의 형편이 호전되자 그들의 전통은 다시 예전대로 전승될 수 있었다.
≪대전회통 大典會通≫ 장악원조의 기록을 보면 영조 때 장악원에서 정립된 관현맹의 전통은 조선 말기 고종 때까지 장악원의 역사와 함께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성종 당시 대비전에서 베푼 진풍정(進豐呈)이나 중궁의 예연(禮宴)에서 관현맹인은 여기와 함께 연주를 담당했는데, 그들은 모두 녹색 명주로 만든 두건(頭巾)을 쓰고 오리목 녹색의 무명으로 만든 단령(團領)을 입고 놋쇠빛 붉은 가죽띠를 띠었다. 이러한 관현맹인의 복식은 조선 말기까지 큰 변화 없이 전승되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