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인돌은 광명시청의 남쪽 100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이것을 광명고등학교로 이전하기 위해 1985년 1월 5∼20일에 걸쳐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 전의 상태는 동서 받침돌[支石]이 없고 남북 받침돌만 남아 있었으며, 덮개돌[上石]은 동쪽으로 미끄러져 내려 동단(東端)이 땅에 닿아 있었다.
덮개돌은 석영이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상부는 편평하고 하부는 동단이 서단보다 두꺼운, 균형이 잡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덮개돌의 사방에는 끝이 날카로운 삼각형의 연장으로 돌을 다듬은 치석(治石)의 흔적이 많았다. 이렇게 단단한 암석을 다룰 정도의 연장은 철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받침돌은 모두 안쪽으로 기울어져 서쪽의 상단이 맞닿아 있었다. 남쪽 받침돌은 전체적인 모양이 반월형(半月形)으로 비교적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나, 북쪽 받침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외형상으로 덮개돌의 크기에 비해 받침돌의 규모가 작아 전체적으로 균형이 불안정한 상태로 놓여 있었다.
돌방[石室]을 이루고 있는 적석구조(積石構造)에는 10∼30㎝ 크기의 괴석(塊石)이 석실의 장축방향(長軸方向)에 따라 나열되어 있었다. 적석구조의 내부에는 백자편(白磁片)ㆍ청자편(靑磁片)ㆍ기와편[瓦片] 등이 뒤섞여 후대에 교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이 축조될 당시의 유물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으나, 한강 이남에는 이러한 북방식 고인돌이 많지 않아 학술연구상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고인돌은 한국 고인돌의 장축방향이 강물의 흐르는 방향과 일치한다는 점과 관련시켜 볼 때, 안양천(安養川)의 지류와 일치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고인돌이 축조된 시기는 개석의 사방에 예리한 연장으로 치석한 흔적이 남아 있는 점에서 이미 금속기가 사용된 시기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인돌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적석구조가 교란되고, 이 유적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유물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