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삼국유사』를 저술한 사찰터.
개설
현재의 사찰 경내는 좁고 좌우측에는 넓은 평지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경내에는 최근 해체 · 보수된 극락전과 요사 2동, 명부전, 국사전, 미륵전, 산령각, 일연선사 생애관,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보물, 1965년 지정)가 있다. 보각국사탑비는 1153년(의종 7)∼1155년 사이에 죽허 스님이 왕희지 글씨를 모아 세웠지만, 임진왜란 당시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절 앞 길가에는 만월당과 청진당, 두 분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내용
1991년과 1992년 2차례에 걸쳐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대웅전터로 추정되는 기단부(基壇部)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어 신라 말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99년에는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에서 사역확인을 위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사역이 대략적으로 확인되었다. 2007년 10월부터 (재)불교문화재연구소(현, 불교문화유산연구소)에서 총 5차례에 걸쳐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2008년 10월 5차 발굴 당시 미륵당 부근에서 불교의식구인 금동병향로(금동으로 만든 자루 달린 향로), 청동향합(청동으로 만든 향 담는 그릇), 청동정병(청동으로 만든 물병), 청동이중합(청동으로 만든 두겹 그릇), 청동반자(청동으로 만든 북) 등이 한꺼번에 출토되었다. 또한 미륵당터 주변과 인각사 앞 도로를 따라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가 다수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주불전을 중심으로 다수의 건물이 밀집되고 그 앞으로 회랑이 중첩되어 있어 양주 회암사지나 춘천 청평사처럼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최소 3개 이상의 별원(別院)으로 구성되었던 대규모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일연스님이 주석하기 전까지 인각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고려시대 이전 인각사는 사세가 미미했던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던 거대한 사찰로, 그 규모는 당시 수도였던 경주지역을 제외한 지방사찰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인각사 삼국유사의 탄생』(이종문, 글항아리, 2010)
- 『한국의 사찰문화재 - 대구광역시 경상북도1』(문화재청·재단법인 대한불교조계종 유지재단 문화유산발굴조사단, 2007)
- 『군위 화산 인각사 사역확인 시굴조사 보고서』(군위군·조계종문화유산발굴단, 2004)
- 『화산 인각사-사역확인 시굴조사 보고서』(경상북도,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1999)
- 「인각사의 성격과 변천」(이병휴·한기문, 경북대학교박물관·군위군, 『화산 인각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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