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전주부윤, 함경도관찰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임(子任)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5년(연산군 1)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강릉(江陵)
주요 관직
양주목사|전주부윤|함경도관찰사|호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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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전주부윤, 함경도관찰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임(子任). 김필양(金匹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대(金臺)이고, 아버지는 김세훈(金世勳)이며, 어머니는 권송(權悚)의 딸이다. 형이 동지중추부사 김광철(金光轍)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6년(중종 21)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37년(중종 32) 시독관(侍讀官)으로써 궁금(宮禁) 안에서의 여알(女謁)의 폐단을 제거할 것을 건의하였다. 집의를 거쳐 전한이 되었으며, 같은 해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여 체직되었다.

1540년 다시 진주목사로 나가 민폐를 제거하고 위엄과 은혜를 베풀어 아전들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칭찬하는 치적을 많이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포상을 받고 당상관이 되었다.

1541년 제포첨사(薺浦僉使)가 되었을 때, 군령(軍令)을 어긴 죄로 파직될 뻔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다시 파직만으로는 벌이 가벼우므로 고신(告身)마저 빼앗아야 한다고 적극 주장해 결국 파직되었다.

1544년 다시 양주목사로 나가 흉년을 구제하고 백성들을 구휼하고 부역을 고르게 한 공으로 포상을 받았다. 1546년(인종 1) 차사원(差使員)으로 파견되어 특별한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승진했으며, 1547년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양하자, 군졸이 피폐하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하니 군졸을 다스리고 방어에 대비하라는 왕의 명을 받고 그 일에 힘썼다.

1549년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로 나갔으나, 이듬해 역적 이치(李致)의 노비·전답·재물을 추쇄한 문서를 즉시 수송하지 않아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51년(명종 6) 전주부윤이 되었고, 1553년 함경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554년 군사를 다스리는 데 치적을 쌓아 곧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육진(六鎭)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폐단만 늘어나자 다시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55년 함경도 지방의 호인(胡人)의 토벌과 군사들을 다스리는 데 힘을 다해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1557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풍년이 들지 못한데다가 왜구마저 침입해 군사들이 곤핍하므로, 지방 수령들을 순찰할 시기라 하여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564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주로 지방 관직에 있으면서 많은 치적을 쌓아 명성이 높았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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