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북청 출생.
6·25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12세였던 나이로 전라남도 여수로 피난하여 여항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공부를 하기 위하여 구두닦기를 하면서 당시 여수권투체육관 방호남(方虎男) 사범 밑에서 운동을 시작하였다. 선천적으로 권투에 소질을 타고 난 그는 1957년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개최된 전국학생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 웰터급(welter級)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서울 성북고등학교 이희석(李熙錫) 교장의 스카웃으로 성북고등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한국체육관에서 운동하였다. 1957년 10월 제3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하였으며, 1958년 3월 제3회 도쿄아시안게임 최종선발대회에서 우승하였고, 1958년 11월 제12회 전국선수권대회에서 또다시 우승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59년 6월 제10회 전국학생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고, 그 해 7월 제17회 올림픽파견 제1차 선발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또 그 해 10월 제40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 11월에 제13회 전국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다.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대회 파견 최종선발대회에서 우승하여 올림픽대회에 참가하였으나 제1차전에서 이탈리아 니노 벤베누티에게 석패하였다.
아마추어 해외경기로서 1958년 제3회 아시안게임 웰터급에서 1위한 바 있고 로마올림픽대회를 계기로 프로(PRO)로 전향하였다. 서울에서의 아마추어선수생활을 할 때에는 서울 을지로 3가에 있던 한국체육관에서 당시 노병렬(盧炳烈) 사범의 지도를 받았다. 아마추어 전적은 88전 87승 1패였다. 프로로 전향한 뒤 한국체육관 관장 이상묵(李常默)을 매니저로 맞이하였다.
프로경기 제1차전은 이(李)안사노와 대전하여 7라운드에서 TKO승을 거두었고, 제2차전은 1961년 10월 챔피언을 지낸 강세철(康世哲)을 7라운드에서 KO승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62년 4월에는 일본 와타나베(渡辺亭)를 맞이하여 3라운드에서 KO승을 거두었고, 일본선수 시노자와(篠澤佐久次)와의 경기에서는 3라운드에서 기권승을 거두었다.
1963년 5월에는 로베르토 베니야와 시합하여 6라운드에서 KO승을 거두었고, 5월에는 강규순과의 대전에서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으나 강규순측에서 재도전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7월 또다시 판정승을 거두었다. 1963년 12월에는 일본인 사이토(齋蕂登)와 대전하여 3라운드에서 KO승을 거두었다. 1964년 1월에는 미국인 조지 카더와 대전하여 6라운드에서 KO승을 하였고, 9월에는 강순규를 맞이하여 8라운드에서 KO승을 거두었다.
10월에는 올림픽에 함께 참가하였던 김득봉을 맞아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1966년 1월에는 일본인 가이즈 후미오를 맞이하여 동양태평양(OPBF)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6·25전쟁 15주년을 맞이하여 장충체육관에서 WBA세계챔피언인 이탈리아 니노 벤베누티를 맞이하여 15라운드 판정승으로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66년 12월에는 헬링톤과 15라운드경기에서 판정승하여 제1차 방어에 성공하였다.
1967년 9월에는 일본인 사사키(笹崎邦華雄)와 대전 6라운드에서 KO승으로 OPBF 3차 방어를 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미국 흑인인 프레드 리틀과의 15라운드 타이틀경기에서 판정승하여 제2차 방어에서 성공하였다. 1968년 2월에는 알리파라와 12라운드 제4차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같은 해 5월 이탈리아에서 산드로 마징키와 대전하여 WBA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을 상실하였다.
같은 해 11월 미나미 히사오(南久雄) 선수와 대전 OPBF미들급 타이틀을 상실하였으나 다음해인 1969년 3월 남구웅에게 재도전하여 타이틀을 되찾았다. 프로복싱으로 전향한 7년간 49전 45승 2무승부 2패의 빛나는 기록을 세웠으며 왼손잡이로 알려졌다. 그의 복싱생활 중 빛나는 영광은 첫째 한국사상 처음으로 동양챔피언이 된 것과, 둘째 OBF타이틀의 자진 반납과, 셋째 운동선수로서 누구보다도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