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일 출신. 1901년 관립의학교를 수료하고 그 해에 숭령전참봉(崇靈殿參奉)이 되었다. 그 뒤 흥해면협의원·흥해공립보통학교 교무위원·흥해명신학교 학감 등을 역임하면서 개화기 교육 사업에 공헌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뒤 서울로 이주하여 승동교회에 적을 두었고, 1923년에 장로가 되었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쇄된 뒤, 목사양성기관을 만들기 위하여 조선신학교설립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거액을 설립기금으로 내놓았다.
그런데 설립인가를 받아내지 못하여 조선신학교는 1940년 4월 19일에 경기도지사의 사설학원인가로 개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초대학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 학원을 설립하고 후원하였을 때 그를 강력하게 만류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국인들이 신학교를 세워서 교육하는 일은 선교사들의 과거의 공로와 업적을 무시하는 배신행위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교회 목사양성을 조선교회가 자주적으로 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 신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