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행 ()

고려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겸판사헌부사, 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 등을 역임한 환관.
이칭
이칭
김광대(金廣大)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98년(태조 7)
주요 관직
문묘조성제조|겸판사헌부사|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
관련 사건
조선건국|제1차왕자의 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전기 겸판사헌부사, 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 등을 역임한 환관.
생애 및 활동사항

초명은 김광대(金廣大).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판내부사(判內府事)에 이르렀으며, 1357년(공민왕 6) 왕의 뜻을 좇아 정릉영전(正陵影殿)의 대역사를 일으켜 많은 재력을 소모하였다.

1374년 9월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선왕 때의 대역사를 일으킨 죄로 익주의 관노가 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391년(공양왕 3)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되어 경연에 참석하려는 왕에게 경연에 하루 참석하지 않아도 정사에 해로울 것이 없다 하여, 나가지 못하게 하고 불법을 강론하여 이를 믿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이듬해에 태조의 명을 따라 팔각전을 보수하였으며, 이 해 7월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394년(태조 3) 왕명에 따라 홀치방동(忽赤房洞)에 내구(內廐)를 지었으며, 1397년에 판경흥부사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사복사농선공감사(判慶興府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司僕司農繕工監事)가 되고 가락백(駕洛伯)에 봉해졌으며 곧이어 문묘조성제조(文廟造成提調)가 되었다.

이 해 12월에는 겸판사헌부사(兼判司憲府事)로 수충보리공신(輸忠輔理功臣)에 녹훈되었으며, 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삼군부(三軍府)의 문에 효수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