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장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 공민왕)을 원나라에서 숙위(宿衛)할 때 호종하여 공민왕이 즉위하자 일등공신이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6월 판태복사(判太僕事)로서 기철(奇轍)을 주살한 공으로 이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올라 전(田) 200결과 노비 10구(口)를 하사받았으며, 6월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로 개성윤(開城尹) 양백안(楊伯顔)과 함께 극성방어사(棘城防禦使: 극성은 지금의 황해도 황주)가 되었다.
다음 해 8월에는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임명되었다. 1372년 7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진헌사(進獻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방물을 바치고 다음 해 2월에 중서성의 자문(咨文)을 받아왔다.
1374년(우왕 즉위년) 공민왕이 살해되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북원(北元)에 가서 국상을 알렸다. 이때 북원에서는 공민왕의 후사로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손자인 탈탈불화(脫脫不花)를 고려왕으로 삼아 들여보내자 그들을 따라 신주(信州)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고려의 중 소영(小英)이 탈탈불화와 비밀리에 통하는 사실을 탐지하고 탈출해 돌아와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그 결과 그들의 계략은 실패하고 소영은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