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지는 조선 후기 서북 지역 출신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가족이 헤어졌다 만나는 일을 겪었는데, 그와 형제들은 효도와 우애로 칭송을 받았다. 효종대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형조좌랑 및 예조정랑 등의 중앙 관직을 역임하였다. 평안도 강동 및 어천 등지의 지방관으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본관은 연안(延安), 평안도 정주(定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삼준(金三俊)이다. 5세의 어린 나이에 병자호란을 겪었는데, 어머니가 자살하고 가족이 모두 흩어지는 불행한 일을 겪었다. 뒤에 가족을 다시 만났는데,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항상 형의 뜻을 따랐고, 재물이 생기면 모두 나눌 정도로 우애가 깊어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 경주김씨 호군(護軍) 성탁(聲鐸)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성하(聖河)를 얻었고, 단양이씨인 사인(士人) 이시익(李時益)의 딸과 재혼하여 태하(泰河), 도하(道河)를 얻었다.
김성하는 문장과 행실로 신망을 얻었고, 김항만(金恒萬) · 김장만(金長萬) · 김옥만(金玉萬)의 삼형제를 두었다. 김태하는 명경학(明經學)을 공부하였고, 김도하는 시(詩)를 잘 지어 이름이 났는데, 두 형제가 후사 없이 요절하여 장만과 옥만이 각각 후사를 이었다. 김장만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지냈다.
1657년(효종 8) 26세의 나이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중학훈도(中學訓導)가 되었다. 1660년(현종 1) 가주서(假注書)가 되어 국왕의 유지(諭旨)를 받들어 지방에 있는 송시열에게 전달하고 대답을 받아오는 일을 수행하였다. 이후 사헌부감찰을 비롯해 형조좌랑 · 예조정랑 ·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등의 중앙 관직을 역임하였다. 항상 왕명을 받으면 그날로 떠났다가 임기를 마치면 조용히 귀향하는 청렴한 행실을 보였다.
평안도 강동(江東) · 어천(魚川)을 비롯해 신천(信川) · 풍천(豊川) 등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지역 토호(土豪)들의 분쟁을 문장으로 알아듣게 타일러 해결하였다. 허물어진 관청을 수리하고, 백성들의 원통한 송사(訟事) 등을 잘 해결해 선정을 베풀었다는 칭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