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상은 조선 후기, 김장생의 문인으로, 충절과 효행이 뛰어나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 기록된 효자이다. 전라도 남원에 거주하였던 학자이자 문인이다. 현종 대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김장생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성리학을 강학하고 장려하며, 어버이 봉양과 효도를 다하여 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한치상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군거(君擧), 호는 은탄(隱灘)이다. 전라도 남원(南原)에서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생원 한경오(韓儆吾)이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무반(武班)으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충성을 받친 공으로, 1455년(세조 1)에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책록된 안양공(安襄公) 한종손(韓終孫)의 후손이다. 청주 한씨 종회 자료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에 태어났으며 1713년(숙종 39) 10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1669년(현종 10)에 26세의 나이로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면, 흉악한 무리들이 함부로 세운 사우(祠宇)는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김장생의 문묘 종사는 1688년(숙종 14)에 이르러 성사되었다.
성품이 순후하고 독실하였고, 성리학을 강학(講學)하고 장려하였으며, 어버이를 봉양하고 뜻을 받드는 데 조금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는 칭송을 받았다. 호남 지방의 충절과 효행 등에 관한 기록을 모아 편찬한 『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 효자로 이름이 올라 있다.
당시 김장생의 문인들은 충청도 논산의 연산(連山) 지역에 돈암사(遯巖祠)를 세우고 스승의 위패를 모셔 놓았는데, 현종 대에 사액(賜額)을 받아 돈암서원(遯巖書院)이 되었다. 돈암서원은 고종 대에 들어 서원 철폐를 대대적으로 시행할 때에도 충청도의 대표적인 사액서원으로 보존되었다. 현재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그리고 송준길과 송시열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고,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