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휴(朴承休)의 본관은 밀양(密陽). 충청도 덕산현(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지역의 덕망 높은 집안 출신이다. 명종 대의 대제학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이 증조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박호현(朴好賢), 아버지는 통례원 봉례를 지낸 석곡(石谷) 박안행(朴安行)으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금부 도사로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위하였다. 어머니는 한양조씨(趙氏)는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12세손인 교위 조흥무(趙興武)의 딸이다. 형 박승인(朴承仁)과 동생 박승건(朴承健)이 있었고, 동생 박승건과 함께 형제가 과거에 급제해 이름을 날렸다.
16세에 혼인하였는데, 부인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김영지(金榮址)의 딸이자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현손녀이다. 박신주(朴新冑) · 박문주(朴文冑) · 박성주(朴聖冑) · 박래주(朴來冑) · 박상주(朴相冑) · 박최주(朴最冑) 등 여섯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박신주는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兵使)를 역임하였고, 박두석(朴斗錫) · 박몽석(朴夢錫) 등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1630년 (인조 8)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항상 편안하고 단아한 태도를 지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칭찬을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간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이때 외종사촌인 조극선(趙克善)과 의병을 도모하기도 하였는데, 일이 성사되기 전에 강화 조약이 이루어지자 향리로 내려가 부모 봉양에만 힘썼다.
1650년(효종 1) 4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었고,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과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 · 헌납 등에 임명되어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1654년(효종 5)에는 국왕이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내며, 신하를 믿지 못한다는 내용의 비판 상소를 올렸다.
효행이 뛰어나 효인(孝人)으로 칭송을 받았다. 집에서는 항상 부모가 계신 방을 향해 앉거나 누웠고, 부모의 병간호를 위해 관직을 그만두었다. 부모의 병색이 깊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며 돌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숙종 대 효자 정려를 받았다.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에 있는 정려각은 1990년에 중수되었고, 홍살문 형태의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