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승지,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설서(說書)를 거쳐 1720년(경종 즉위년)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때 너무 관인하여, 왕으로부터 국론에 대한 올바르고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조가 즉위한 뒤 문학 · 지평(持平) · 수찬(修撰) · 교리(郊理) 등을 지내면서 소론의 처결과 노론 4대신(四大臣) 복작(復爵: 관작의 회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북평사(北評事)를 거쳐 시독관으로 육진(六鎭)의 병폐를 정리하는 소를 올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1731년 승지에 이어 대사간 · 이조참의 · 승지 ·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738년 진하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성품은 매우 침착, 관인하였으며, 의리와 처세에 항상 조심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약파만록(藥坡漫錄)』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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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十三(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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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상소 내용 : 『영조실록』 9권, 1726년(영조 2) 4월 5일. "시강관 김용경이 육진의 폐단을 바로잡도록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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