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문화권에서는 노사(노동)관계를 인적자원 관리(human resources management)와 함께 산업관계(industrial relations)의 두 핵심 분야로 거론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노사관계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노사(노동)관계는 넓은 뜻에서 생산을 둘러싼 일체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 of production)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고용의 직접 당사자인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와 각종 시민단체(civic society) 등이 고용조건은 물론, 산업 전반에 따른 의사결정을 둘러싸고 조성하는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노사(노동)관계는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산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전개과정에 따라 그 기구와 내용도 함께 변하고 있다. 즉, 기업 내 의사결정이 개별 고용계약에 맡겨지던 산업혁명 초기에는 노사(노동)관계가 개별기업 내 사용자와 개별노동자 간의 관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적 고용관행, 즉 사용자의 임의고용원칙(principle of employment at will)에 대항하여 노동조합이 만들어지자, 노사(노동)관계도 사용자와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사회관계로 바뀌었다.
그리고 산업화와 함께 정치적 민주의식이 확산되어 노동자의 단결권이 보장되자, 조합도 자주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근대적 노사(노동)관계에서는 노사간의 대등성과 자율성을 기본 요건으로 거론하게 되었다.
한편, 공업화의 발전과 함께 피고용인구가 급증하자 노사(노동)관계는 경제질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존립의의까지도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부상되고 있다.
노동문제가 노·사 양 당사자만이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로 발전되면서 정부의 관여도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오늘의 노사(노동)관계는 노·사, 그리고 정부라는 세 당사자가 행위주체가 되는 3자 구성원칙(principle of tripartism)의 사회적 관계로 정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행위주체상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용이 노사(노동)관계의 기반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고용은 노사간의 이해조절과 협조증진이라는 상호보완의 과제를 수반하고 있다.
즉, 고용은 사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피고용자에게는 생계유지를 위한 수입의 근거가 되고, 나아가 경제운영의 기반인 유효수요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용은 생산을 촉진하기 위한 협력적 측면과 함께 노동조건의 결정에 따른 대립적 측면이 있으며, 노사(노동)관계의 주요 제도 또한 이해조절을 위한 단체교섭과 노사간의 협조를 증진하기 위한 노사협의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이 같은 노사(노동)관계의 두 기능분야는 합리적 노사(노동)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불가결한 요소인 동시에 상호보완적 기능을 발휘하는 주요 장치가 된다.
한편, 노사(노동)관계는 고용을 근거로 조성되지만 전체 사회의 문화나 정치질서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크게 좌우된다. 예컨대, 하향적인 정치나 사회질서,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용관행, 그리고 계획·통제 또는 일부 독과점기업에 의해 시장질서가 좌우되고 있는 사회환경하에서는 민주적 노사(노동)관계보다 전제적 노동관계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특정 국가의 노사(노동)관계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기반이 되는 역사와 정치구조 등 문화적 배경에 대한 검토가 불가피하게 된다.
노사(노동)관계를 임금노동자 개개인과 사용자 간의 관계로 파악한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 같은 뜻의 노사(노동)관계가 18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고공(雇工:머슴)과 이들을 고용한 양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관영공업에 임용된 사공(私工)과 관리자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노사(노동)관계를 노동단체와 사용자 간의 관계라기보다 근대적 의미로 정의한다면 구한말 개화기 이후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1898년 이규순(李奎淳) 등이 성진부두에서 47명의 노동자를 조직하여 노동조합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구한말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 광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광부단체와 러시아 광업회사 간의 집단적 관계에서부터 싹텄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노사(노동)관계는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일본 자본이 들어오고, 임금노동자가 등장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식민자본이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파행적이나마 공업이 발전하였고, 이와 함께 우리 경제구조도 일본경제에 예속되었다.
일본독점자본에 종속되어 만들어진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질서는 식민지 특유의 초과이윤 극대화를 기반으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식민지 초과이윤은 자본축적 초기단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전제적 노사(노동)관계가 매개가 되어 실현되었는데, 당시 노사(노동)관계는 개인종업원을 대상으로 체결하는 고용계약이 기반이었다.
이로 인해 사용자가 고용조건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종업원은 신분상의 예속마저 강요되는 전제적 노동관계가 조성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예속적이며 파행적인 공업화가 추진되었다.
즉, 일본인 자본가는 아무런 제한 없이 노동자를 혹사하여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었으며, 기업 내 의사결정을 일방적으로 주관하고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노사(노동)관계는 흔히 저임금·고한노동(sweat labor), 그리고 여성 및 연소노동자의 폭넓은 활용, 강권적이며 신분적 노사(노동)관계의 조성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한편, 일제에 의한 강압적 노동통제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을 가져왔는데, 당시 국내 공업자본 중 94%가 일본인 소유임을 감안할 때, 이 같은 노동자의 집단행동이나 이 기간 중의 노동쟁의는 일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3·1운동을 비롯해 전국적인 민족저항운동 이후 이어지던 일제의 회유정책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조직화가 가능하였다.
또 조직노동자를 기반으로 그 역량 또한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노조조직의 이 같은 세력화를 규제하기 위해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운동에 대한 규제를 마침내 제도화하였다.
이 같은 치안유지법 제정으로 합법적 노동조직이나 활동전개가 불가능하게 되자 노동운동은 폭력을 수반한 저항운동으로 전환되었고, 1931년 일제에 의한 이른바 만주 침범이 시작되자 군국체제로 식민지의 지배정책이 전환되면서 더 이상의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1930년대 말부터는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한 이른바 ‘산업보국연맹’만이 유일한 기업 내 단체로 군림하게 되었고, 이 같은 상황은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의 종전까지 이어졌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하에서의 노사(노동)관계는 한마디로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는 혼돈의 시기였다. 광복과 함께 맞게 된 미군정 기간은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개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북분단과 점령통치라는 타율적인 정치상황은 식민지경제구조를 청산하기보다 오히려 한국경제를 세계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분업체계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그 형태는 다르지만 기본 경제구조가 이전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한반도 북부는 공업, 남한은 농업이라는 일제식민정책의 산물이 종전(終戰)에 따른 국토분단으로 인해 상호보완적 기능을 잃게 되자 남북한 모두에게 경제적 파행을 심화시켰고, 이로 인해 예속적인 노동관계 또한 한층 심화되었다.
이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유지되던 전제적 노사(노동)관계가 오히려 강화되어 일제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 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노동자의 자유로운 조직활동이 보장되고 조합세력이 확대되자 파업 또한 빈번하게 발생했고, 비조직 노동자까지 집단행동에 가담함으로써 노사간의 대립과 충돌은 이 기간 중 노동관계의 대표적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사회주의이념을 기반으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가 결성(1945.11.)되고, 전평은 이후 정치지향적 활동에 몰두하였는데, 이 같은 전평 활동이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자 보수 노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 1946.3. 결성)만이 유일한 노동조직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대한노총이 노동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노총이 노동운동을 주도하던 1947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노동조합이 투쟁적 성격에서 벗어나 개방된 시장경제질서 내의 하나로 정착되며 그 활동도 경제영역에 국한하도록 개편되었다.
이 같은 재편과정은 노동법 제정을 통해 진행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법 제정 과정은 법이 생활규범이기보다 제도나 관행에 선행하여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정되는 특이한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헌법>에 노동기본권(주로 노동삼권)이 명시되었고, 1953년에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삼권이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동위원회법> 그리고 <근로기준법>에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노동입법은 경제실상, 개별기업의 여건, 작업장 내 노사(노동)관계 등을 반영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집권층이 지향하는 정치이념 또는 하나의 당위성을 근거로 법제화된 것이기 때문에 법 내용과 법 운영 간에 큰 거리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를 집행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법 내용과 법 집행 간에 그 괴리가 클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노사(노동)관계의 기반인 단체교섭일 경우 헌법과 노조법에는 모두 이를 적극 보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예외적인 것으로 아직도 정착되지 못하고 있으며, 기업에 따라서는 아예 외면되고 있는 실정이다.
단체교섭이 이처럼 정착되지 못한 이유는 교섭 당사자인 노동조합이나 노동관계법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법은 흔히 현실을 기반으로 하나의 관행이 조성되고 또 이 같은 관행에 사회적 합의와 규범의식이 싹틀 때 제정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또 이 같은 절차를 거쳐 제정될 때 비로소 법은 실용성과 정통성을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등 개별 또는 집단노동관계법은 그 제정과정과 배경 모두가 이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즉, 노동조합정책이 처음 법제화된 1953년의 <노동조합법>에는 다양한 노동조합육성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같은 조합육성책이 사회적 합의나 노동관행 또는 경제적 실상에 근거를 둔 것이기보다는 오로지 정치적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따라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정법에는 노조육성지원책이 반영되어 있으나 이 같은 정부정책이 종속적 노사(노동)관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으며, 6·25전쟁(1950∼1953) 이후 1950년대의 정치·경제적 위기상황은 이 같은 종속적 노동관계를 오히려 한층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정부수립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의 경제상황은 6·25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경제를 복구한다는 명분하에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관료독점자본이 가혹한 노동수탈을 자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전제적 노사(노동)관계는 한층 심화되었다.
5·16군사정변과 함께 개편된 1963년의 개정노동법도 변화된 고용관행이나 작업장 내 노사(노동)관계 실태와 무관하였다는 점에서는 법 제정 당시와 별로 다를 바 없다. 1963년도의 노동관계법 개정은 노조의 난립을 예방하고, 그 동안 노동단체의 병폐였던 정치세력과의 유착을 방지하며, 교섭이나 노사간의 대립보다는 노사간의 협의·협조를 촉진하여 경제개발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원하려는 또 다른 정치적 요구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63년 법 개정 후 1970년에 이르기까지의 <노동조합법>에도 외형상으로는 노동조합육성책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나, 법운영이나 정부의 실제정책은 형식상 법 규정이나 명분과는 아주 달라 법제정 당시와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 주도로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노사(노동)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나 통제는 제도와 관행을 통해 오히려 한층 강화되었다.
이 같은 제도도입과 관행조성으로 정부는 노동운동을 실정법에서도 규제하기 위해 기초를 다져 놓았다. 노사(노동)관계에서 노사협조만을 정통시하려는 정부의도는 유신정치시대가 시작된 1971년에 제정·공포되어 유신체제가 끝나고 새로운 군사정권이 발족한 1981년까지 시행되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보다 극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즉, 사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유일한 규제수단인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이 법의 시행으로 사실상 규제 또는 유보되면서 형식상의 조합육성책과 달리 사실상의 정부노동정책은 전제적 노사(노동)관계를 한층 강화시킨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사실상의 정부정책이 형식상의 노동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현상은 1980년대 초 분명하게 드러난다. 1980년 새로운 군사정부 출범과 함께 개정된 <노동조합법>에서는 그 동안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어 오던 각종 노조육성방안마저 전면 삭제됨으로써, 그간 이어져 오던 명목상의 조합육성책이 조합활동규제로 선회하는 노동조합정책상의 큰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즉, ① 유니온 숍(union shop) 등 노동조합 강제가입제도의 금지, ② 노동조합의 지역조직 불허, ③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정족수 도입, ④ 노동조합 상부단체의 기업단위교섭 관여 금지 등의 조항이 신설되어 노동조합 결성과 운영이 모두 규제대상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 같은 대 조합정책으로 인해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은 모든 임금노동자가 제한 없이 가입하는 근로자의 보편적 단체가 아니라 일부 노동자만의 예외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크게 확대된 경제규모나 공업화와 더불어 급증한 임금노동자 수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에 가입된 조직노동자 수는 전체 인구의 2%를 밑도는 100만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더구나 이 같은 조직노동자 중에도 영향력 발휘가 기대되는 대기업 종사자나 지식층 근로자는 거의 예외 없이 배제되었던 것이 1987년 이전까지 우리 나라 노조의 실상이다.
1987년 6·29선언을 계기로 정치적 민주화가 신장되고 노동기본권 보호가 강화되자 그 동안 누적된 노동자의 불만이 일시적으로 폭발하여 전국적인 쟁의로 이어졌고, 또 이 같은 정치 및 사회환경 변화는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초래하였다.
1987년 개정노동관계법의 주요 내용은 1980년의 조합활동규제를 부정하고, 노조를 육성·보호하려는 것이어서 그 방향이 또다시 바뀌게 된다. 개별 근로관계에서도 최저임금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모든 변화는 기본권을 강화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한편, 노동기본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시도는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마련한 1991년의 노동관계법 개정 시도에서 이루어졌다. 1991년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던 국회에서 시도된 노동조합법 개정안에는 민간부문 종사자뿐만 아니라 공무원(6급 이하)과 국공립 교원에게도 노동기본권을 적극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1991년의 이 같은 법개정 시도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모든 제도나 보장도 실은 한낱 정치세력의 변화를 시사하는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1990년 이후에는 급변하는 경제환경과 세계화(globalization)로 인해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환경 모두가 변하고 있는데 이 같은 변화는 노동관계에도 새로운 제도도입과 관행정립을 불러오게 하였다.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 가입과 함께 세계화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 나라도 1992년 그 동안 UN 전문자문기구 중 유일하게 가입할 수 없었던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의 회원이 되었고, 뒤 이어 1996년 국제개발협력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지위는 크게 개선되었으나 이와 함께 우리 나라도 국제적 경기운영 규칙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하게 되자 국제기구로부터 ILO 기본 조약(core conventions)에 위배되는 국내 노동관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국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에 앞서 정부가 ILO의 결사의 자유와 연관된 기본 조약(조약 제87호, 제98호 및 제151호)에 위배되는 국내 노동관계법 개정을 약속하면서 1996년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파동까지 겪게 되었다.
OECD와의 약속 이행을 위해 1996년 12월, 여당 단독으로 국회를 소집하여 노동관계법 개정을 처리하였으나 그 내용은 당초 국제기구와 약속한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오로지 경제적 필요성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한 내용만이 개정법에 반영되어 국내 노동계는 물론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1997년 3월 ‘1997년의 개정 노동법’을 무효로 하고 또다시 법을 개정하는 노동법개정 파동을 겪게 되었다.
1997년 또다시 개정된 노동관계법에는 집단노동관계법뿐만 아니라 개별노동관계법인 근로기준법도 포함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해 1997년 도입된 정리해고제도를 1999년부터 시행하도록 유보한 것이다.
한편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통합하여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으로 개편하고, 동시에 노사협의회법을 보완하여 근로자의 경영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근로자 경영참여촉진법’으로 개편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이 같이 재개정된 법 내용도 경제실정과 동떨어진 노사 양측의 요구를 모두 외면한 것이라는 점에서 개정 이전의 법 내용과 다를 바 없다. 더구나 재개정된 법 내용이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의 요구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또 한번 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 나라는 1997년 말 이래 외환 부족으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고 그 조건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한 법 개정을 정부가 약정하게 되면서 노동관계법의 개정이 불가피하였다.
한편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고, 뒤이어 1998년 새 정부가 수립되자,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산업개편과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라는 새로운 국론조정기구를 발족시켰다.
현재 ‘노사정위원회’에서는 IMF의 요구사항인 정리해고제 및 근로자 파견제도의 도입과 ILO 및 OECD 요구사항인 노동기본권 강화, 특히 그 동안 노동3권이 제대로 지켜져 오지 않던 공무원과 교원의 노동권 보장을 결의하게 됨으로써 노동관계법 개정이 또다시 공론화되고 있다.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mergers and acquisitions, M&A)에 따른 정리해고를 합법화하기 위한 새로운 고용관행의 도입은 연공서열을 기반으로 하는 그 동안의 고용관계를 크게 변형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근로자 파견제도의 법제화는 비상용직 근로자(contingent worker)의 급증을 촉진함으로써 고용관계의 기반부터 변형시켜 향후의 노동관계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노동정책은 노사간의 대등한 교섭력을 보장하기 위해 강구된 노동3권을 기반으로 교섭과 협의의 합리적 조화를 통해 조성하기보다는 노사협의제의 강행이나 근로자의 일방적 협조를 강요하여 조성하려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같은 정책기조는 1980년 노사협의회의 설치를 의무적인 것으로 규정한 <노사협의회법>에 극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노사협의회는 노사간 공동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종업원이 주축이 되어 설치되는 기업 내적 제도로서 흔히 노동조합이 탈(脫) 혹은 초(超)기업형태인 산업별 조직으로 결성된 경우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개별기업 수준에서는 노사협의회만이 종업원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가 되며 기업 내의 유일한 종업원조직인 노사협의회도 그 기능은 노사간 공동 이해사항만을 다루도록 제한하는 것이 특성이다.
이 처럼 기능을 규제하는 까닭은 노동조합과의 불필요한 마찰이나 근로자조직의 이원화를 예방하고, 나아가 단체교섭기능과 노사협의기능 간에 조화를 촉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노사협의회제도는 그 설치대상이나 기능 모두가 노사협의제도의 본래 의도나 성격을 외면한 채 설치 운영되고 있다. 이는 우리 나라의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이 기업 단위 노조인데도 불구하고 노조가 결성된 사업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노사협의제도가 노동조합법에 의해 규제되던 시기(1963년 노동조합법)부터 <노사협의회법>이 독립법으로 제정된 1980년 이후에도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 결성 유무와 상관없이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일 경우 모두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기능도 노사간의 공동 이해 분야만이 아니라 갈등해소에 도움이 되는 모든 사항을 포괄적으로 다루도록 규정되어 있다.
비록 타율적이지만 협의회가 설치되면서 비조직 사업장에서 노사간에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마련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노조가 이미 결성된 사업장일 경우 노사협의회로 인해 종업원조직이 이원화되었고, 또 이로 인해 노동조합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협의회 내의 근로자측 대표는 임금인상과 고용조건 개선 등 노동조합측의 모든 요구사항을 노사협의회에 정규적으로 보고하도록 규정함으로써 협의회는 사실상 교섭기능까지도 대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나마 노동조합의 역할마저 협의회의 설치로 인해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협의제의 도입을 통해 노사간의 대화를 촉진하여 협력기반을 조성하려는 것이 이 제도를 도입한 정부측의 의도였으나, 단체교섭은 외면된 채 노사협의나 협조만이 강요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사협의제도는 긍정적 성과보다는 노사간의 새로운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노사협의제도는 근대적 노사(노동)관계의 기반인 노사 당사자 간의 자율적인 문제해결원칙은 외면한 채 노사문제에 대한 타율적 규제, 특히 정부 개입이 법제화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 주도형의 노사(노동)관계를 고착시켰고, 나아가 노사 당사자에 의한 자율성과 대등성을 크게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노사(노동)관계는 단체교섭의 정착, 노사협의제의 정상화, 분쟁조정 절차의 실용성 회복, 노동자의 합리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 강구, 그리고 점차 증대되는 비상용직 근로자(contingent worker)를 위한 대표기구 조성 등이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합리적인 노사(노동)관계는 사회정의와 산업민주주의 구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조성되어야 할 시급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특히 인적 자원 만이 유일한 부존자원이라는 우리의 경제환경을 감안할 때 인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 없이는 경제안정이나 성장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다. 인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은 합리적인 노동관계가 조성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경제주체가 각자의 주장을 부담 없이 개진하고 이로 인한 갈등을 교섭과 타협을 통해 합리적으로 해소할 때 산업 안정은 물론 경제의 효율성도 제고될 수 있다.
세계화와 함께 한층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경제환경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도 안정된 노동관계 조성은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나라 노사(노동)관계를 합리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노사가 동반자로서의 대등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정착시켜야 하며, 그 제도적 장치인 교섭과 협의 간에 합리적인 균형과 조화가 조성되어야 한다.
노사간의 갈등 표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표출된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사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개방된 시민사회의 안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단체교섭이나 노동조합 등 법에 보장된 조직과 기능이 갈등을 해소하는 합리적인 방안으로 적극 수용되어 노사(노동)관계정책의 기반이 될 때 협조적 노사(노동)관계도 비로소 정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