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는 ≪진서 晉書≫ 여복지(輿服志)의 “대수계(大手髻) 7개의 비녀가 계(髻)를 덮었다.”라는 구절로 미루어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왕비의 대례복에 하게 된 것은 대례복인 적의(翟衣)에 하던 적관(翟冠)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이후 궁중의 제식을 정비하던 중 적관을 구할 수 없자 나라의 풍속에 따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머리의 모양은 고계(高髻 : 높게 틀어올린 머리)와 정발(正髮) 사이에 떨반자·비녀·화관 등으로 화려한 장식을 하였고, 늘어진 머리의 양끝은 비녀를 꽂아 팽팽하게 하였다.
뒤는 두 갈래로 머리를 땋아서 하나는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았고, 나머지는 새앙머리와 같이 둥글게 밑으로 늘어 올려서 검은 자색 댕기로 장식하였다. 현존하는 유물은 없으나 대수를 한 의친왕비(義親王妃)와 영친왕비(英親王妃)의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