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계(北髻) · 후계(後髻) · 낭자(娘子)머리라고도 한다. 머리를 땋아 쪽댕기를 하고 머리 뒤쪽으로 틀어 비녀를 꽂는다.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 주실벽화의 여인 가운데 머리를 뒤로 붙인 모습이 보이는데, 오늘날의 쪽머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 ·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부녀자의 머리 모양이 어떠하였는지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문헌의 단편적인 기록으로 미루어 쪽머리 · 얹은머리 등이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녀자의 머리 모양으로 쪽머리를 장려하게 된 것은 영조 이후로 얹은머리의 성행으로 인한 사치풍조를 없애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쪽머리에 장식하는 족두리 · 화관 · 비녀 · 뒤꽂이 등을 사치한 주구(珠具)로 만들자 다시 얹은머리를 하게 하였다. 정조 때에도 다시 체계금지령(髢髻禁止令)을 내려 쪽머리를 하도록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순조 중엽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한 반가 부녀자들이 쪽머리를 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여자가 15세가 되면 계례(髻禮)를 치르고 쪽머리를 하였고, 15세 미만으로 혼인을 하는 경우에는 혼인 전날 계례를 하고 쪽을 지었다. 계례를 하고 쪽머리를 하던 것이 차차 혼인과 더불어 쪽을 짓게 됨에 따라 일반사회에서의 계례는 없어지고 궁의 나인들 사이에서만 그 습속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쪽진머리는 점차 기혼녀의 상징이 되었다.
처음에 쪽진머리는 머리 뒤쪽에 하였으나, 차차 내려가 조선시대 말엽에는 저고리 뒷고대 바로 위에 하게 되었다. 또, 개화기에는 다시 머리 뒤쪽으로 올라가 오늘날과 같이 되었다. 쪽을 지는 방법은 앞머리 중앙에 가리마를 타고 양쪽으로 곱게 빗어 뒤를 묶고 길게 한 줄로 땋아서 쪽댕기로 끝을 묶는다.
쪽댕기는 남편이 있는 젊은 여자는 붉은자색, 노인은 검은자색을 사용하고, 과부는 검정색, 상주는 흰색으로 하였다. 쪽머리의 장식은 평상시에는 비녀와 뒤꽂이를 하였고 의식 때에는 화관이나 족두리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