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회(大圓會)는 1972년 재단법인 대원정사(大圓精舍)의 설립자 장경호(張敬浩)가 조직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석가모니불의 근본 교리를 신봉하고 수행과 교화를 지향하는 회원들의 상호부조를 위해 만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불자들을 위한 복지 사회를 구현하는 데 기여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대원회는 종파를 초월한 순수한 신행 단체로 “자아를 발견하고 지상에 낙원을 이룩한다”라는 구호 아래 여러 가지 신행 활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불교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1973년 3월, 회원들의 자질을 향상하고, 불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2년제 대원불교교양대학을 창립했다. 1975년 장경호가 죽자 대원회의 활동은 잠시 중지된다. 이후 1981년 공직에 있던 장경호의 아들 장상문이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 대원정사 이사장과 대원회 회장에 취임하게 되면서 대원회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후 대원회(大圓會)는 재단법인 대원정사의 지원을 받는 신행 단체로 있다가 1989년 조직을 확대 · 개편하면서 사단법인 한국불교대원회로 거듭났다.
장상문이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대원회는 300평 규모의 대원불교회관을 별도로 준공하고 법회와 불교대학을 독립적으로 운영하였다. 당시 매주 또는 매월 수요법회 · 기도법회 · 선행반법회 · 어린이반법회 · 중고등반법회 · 청년반법회 등의 정기법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4대불교기념일법회 · 성지순례 · 음악법회 · 철야정진법회 · 수련대회 · 수계식 · 야외법회 · 방생법회 등의 특별법회도 개최하였다. 그밖에 주요 행사로 불교학술세미나 · 불교예술제 · 강연회 · 교리경시대회 · 불교기초강좌 등도 개최하였다. 1985년에는 교육 받을 기회가 적은 지방의 불자들을 위해 단기(7일) 불교대학을 기획하고 광주, 전주, 제주 등을 기점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순회 법회를 개설했다. 매년 7, 8월경 60~70여 곳의 중소도시에서 진행되었던 이 순회 법회는 1992년 장상문이 타계(他界)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장경호가 심혈을 기울여 세운 대원불교교양대학은 최초의 재가불자(在家佛者) 교육기관이었다. 대원불교교양대학은 불교는 기복(祈福)하는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생각을 불교는 공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꾼, 즉 불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이를 위하여 대원불교교양대학에서는 불교계의 유명 교수를 강사로 초빙하고 수강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대원회는 1989년 경기도 양주 봉선사에서 '대중불교결사 전국대회'를 가진 이후 상당 기간 동안 매년 대중 결사를 진행했다. 이 전국대회의 슬로건은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시고, 직장마다 법회를 봉행하고, 마을마다 회관을 건립하자'는 것이었다. 대중 결사에서 결의된 내용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불교 결집인 불교백서의 간행 결의, 새 생명을 살려내자는 취지의 장기기증본부 발족 결의, 전국순회법회 개최 결의, 불교방송 지방망 확장을 위한 100만 서명 결의 등'이었는데 이 결의는 대부분 실천되었다.
1980년부터는 회원들을 위한 월간지 『대원회보(大圓會報)』를 간행하였다. 1985년 7월부터는 『대원회보』를 『대원(大圓)』으로 제호를 바꾸고 2만부씩 발간하여 불교계 내외에 배포함으로써 대중불교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힘썼다. 이후 『대원』은 『대중불교』로 제호를 바꾸어 지속적으로 발간되었으나 장상문이 타계하고 몇년 후 휴간되었다. 문서 포교지로 태어난 『대중불교』는 '구독자가 10만 명이 넘으면 산촌과 어촌의 불자들도 불교를 공부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될 때 이 땅의 불교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당시 불교계의 현실상 3만 5천부 이상의 구독자를 넘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불교 월간지의 구독자가 3만 5천 명이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수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