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해보(諧甫), 호는 취애(翠崖). 아버지는 도원량(都元亮)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선조대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을 구호하고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배척하자 그 잘못을 반박하였고, 박이립(朴而立) 등이 정구를 모함하자 상소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해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1627년 정묘호란에는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정경세(鄭經世)를 도왔다. 주리파(主理派) 성리학을 강조하여 경험적 세계의 현실문제·사회문제보다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시하였다. 대구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는『오현예설(五賢禮說)』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