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는 충청남도 공주 출생으로 할아버지인 남접도주(南接道主) 김시종(金時宗)의 밑에서 동학을 공부하였다.
김시종은 천도교 제2세교주인 최시형(崔時亨) 등의 북접이 광제창생의 이념에 지나치게 철저한 것을 보고 수운사상(水雲思想)에 어긋난다고 생각, 최시형의 북접에 대하여 스스로 남접이라 하고 경상북도 안동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었다.
김주희는 1904년 할아버지의 뜻을 받아 김낙춘(金洛春) 등과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서 교당을 세우고 경천교(敬天敎)라 하였으나, 이 교단도 1908년부터 항일운동 조직으로 탈바꿈하고자 하여 김주희는 이에 결별을 선언하고 속리산으로 은둔해버렸다.
경천교는 1912년 까지 존속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1915년 에는 경상북도 상주군 은척면 우기리 자기집에 동학본부라는 간판을 걸고 다시 포교를 시작하였다.
1922년 5월 에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얻어 포교에 주력하여 교당을 신축하고 충청북도, 경상북도, 강원도 지역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1929년 통계에 따르면 신자가 1,50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게다가 1933년까지 한문경전 10여 종, 한글경전 40책 115종을 목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본부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참여를 외면하였음에도 일제의 탄압을 수차례 받은 결과 1943년 교주 이하 많은 신자들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김주희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 교세는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었다. 김주희의 아들 김덕룡(金德龍)이 교단을 대표하고 있다가 1986년 에 사망하고 현재는 김덕룡의 아들 김정선(金正善)이 책임을 맡고 있다. 현재 신도수는 안동과 상주 지역에 약 50여 가구가 있다.
1979년 에는 동학본부에서 발행한 서책 40책을 한데 묶어 『동학가사』 Ⅰ, Ⅱ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바가 있고, 또 본부 건물 1곽(전통초가 5동과 상하마석 깃대꽂이)이 국가 전통건조물 제 10호로 지정되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동학본부의 교의와 신조는 본래 동학에서 출발하였으므로 천도교와 큰 차이가 없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유 · 불 · 선 삼도합일(三道合一)을 주장한 것을 그대로 취하였으며, 덕에 의하여 무한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수도법이 강조된다. 경전은 『동경대전(東經大全)』을 비롯한 동학경전을 그대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