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명종 때 종사랑을 지낸 이호(李瑚)가 선조인 참봉 이전(李筌)의 유덕을 깊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1591년(선조 24)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재사는 마을의 골 안으로 접어드는 길목의 우측 약간 높은 곳에 누마루 쪽을 정면으로 하여 서향하고 있다. 건물 앞의 길 아래쪽에는 개울이 흐르고 건물의 후방에는 송림이 우거진 작은 뒷동산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현 건물의 안대청 종도리의 장혀 아래 면에는 1947년(丁亥) 4월 20일자 중수상량문(重修上樑文)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집은 안채와 앞채가 이룬 ○자형의 트인 곳에 1칸 돌출하여 연접된 3칸 문간채가 내정(內庭)을 가로막고 선 □자형의 건물이다. 부속채인 대문채는 좌측에서 1칸 대문간, 1칸 마구, 1칸 뒤줏방으로 배열되어 있다.
대문간의 좌단 후우주(後隅柱)가 앞채 상방의 우주를 겸하고 있다. 내정 우측의 안채는 정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사랑방이 각 2칸씩 배설되어 있다. 안방에 연접시켜 달아낸 2칸 부엌과 1칸 찬방이 앞채와 연결되어 있다.
누다락 구조로 된 앞채는 5칸으로 중앙에 3칸 누마루를 두고, 그 양측에 온돌방을 1칸씩 설치하였다. 중앙 3칸의 마루와 문간채 쪽의 상방 앞에는 쪽마루를 내달고 헌함을 돌렸다. 누마루의 아래는 바깥쪽을 흙벽으로 막아 내정에서 수장처(收藏處)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측의 온돌방 아래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안채는 막돌 허튼층쌓기한 토단(土壇) 위에 덤벙초석을 놓아 대청 전면의 중앙기둥만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방주를 세웠다. 두리기둥은 배흘림이 강하며, 기둥상부에 대량(大樑)을 괴어놓은 보아지의 초각형상이 예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대청의 상부가구는 5량가로 대들보 위에 베갯목을 놓아 중도리와 종보를 받쳤고 종보 위에 각대공(角臺工)을 세워 중도리를 올렸다. 종보와 중도리 등 많은 가구재가 새 재목으로 바뀌었으며, 대들보 양단의 상부에 중도리와 보꾹 사이를 막은 삼각형의 당골벽이 이채롭다.
앞채는 막돌 허튼층쌓기한 토단 위에 덤벙초석을 놓고 모두 방주를 세웠는데, 누하부의 기둥은 구조적으로 견고히 하고자 누상부보다 크게 하였다. 누마루의 지붕가구는 3량가로 각대공 위에 마루대를 올렸다. 이처럼 누마루를 들인 □자형 모양의 일반적 평면형태를 취한 재사건물은 경상북도지방에 많이 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