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명왕은 491년부터 519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제21대 왕이다.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장수왕의 손자이며,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의 아들이다. 장수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광개토왕 및 장수왕의 외교정책에 따라 중국 남·북조의 분열을 이용하여 등거리 외교를 맺으며 안정적 국제 관계 속에서 고구려의 전성기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문자명왕 사후 귀족세력들의 상쟁(相爭)이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국왕이 피살되는 등 국내 혼란이 발생하여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관련 사료가 소략하여 문자명왕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498년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불교를 장려함으로써 고대 국가의 정신적 기반 확립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대외 관계에서는 전대(前代)의 외교정책에 따라 중국 남 · 북조의 분열을 이용해 국제 질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였다.
즉, 즉위와 더불어 북위(北魏)로부터 ‘사지절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낭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책봉과 함께 고구려에 친조(親朝)나 왕자의 입조(入朝)를 요구한 북위의 요구에 대해 고구려가 거절함으로써 양국 간의 이면적인 긴장관계가 계속되었다. 양국은 상호 경계와 견제를 지속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른바 조공을 통한 화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위서(魏書)』 봉의(封懿) 열전에 의하면 거란(契丹)이 북위의 변방주민을 노략질 해 갔는데 이들을 다시 고구려가 데려갔으며, 이에 북위의 사신이 문자명왕에 항의해 모두 돌려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고구려와 연결된 거란의 일부세력이 북위와의 외교적 마찰을 발생시킨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고구려는 북위의 요구를 수용하여 변방주민을 모두 돌려주는 등 북위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는 동시에 494년 제(齊), 508년 양(梁) 등 남조의 국가로부터 각각 ‘사지절 산기상시 독 영평이주 정동대장군 낙랑공(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과 ‘무동대장군 개부의동삼사(撫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로 봉해지는 한편, 조공을 통한 외교 관계도 가졌다. 이러한 남조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여전히 북위에 대한 견제를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494년 물길족(勿吉族)에게 멸망당한 부여(夫餘)의 왕과 그 일족(一族)의 투항을 받아들였으며, 백제와 신라를 침공해 497년 신라의 우산성(牛山城), 512년 백제의 가불성(加弗城) 및 원산성(圓山城)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나 · 제동맹(羅濟同盟)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 작전으로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문자명왕은 광개토왕 및 장수왕의 위업을 이어받아 고구려의 전성기를 지속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문자명왕 사후 귀족세력들의 상쟁(相爭)이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여러 국왕이 피살 되는 등 국내혼란이 발생하여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