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사건과 물체를 지칭하므로 물리학의 대상은 자연에 존재하는 물체의 성질은 물론 그 주위에서 발생하는 변화나 운동 모두가 포함되며, 이 자연현상들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법칙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기초학문이다.
물체의 근본적 구성요소를 입자들로 보았을 때 그 주위에 나타나는 변화는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설명되며, 탐구되는 대상의 분류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분야로 나누어진다.
인간이 자연의 사물을 분류할 때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역시 인간 자신이며,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물리학의 대상은 크게 나누어 인간의 오관(五官)으로 관찰이 가능한 대상, 오관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대상, 그리고 인간의 오관으로 감지할 수 없는 미시적인 대상으로 나눌 수 있다.
오관으로 관찰이 가능한 대상에 대한 탐구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우리의 삶과 관련되어 이루어져 왔으며, 오관적인 관점에서 크기와 모양이 없는 기체, 크기는 있으나 모양이 없는 액체, 크기와 모양이 있는 고체로 분류되어 각각의 특성들이 연구되고 있다.
기체와 관련된 분야로는 열 및 통계물리·광학 및 양자전자학·플라즈마 분야 등이 있고, 액체와 관련된 분야는 열 및 통계물리·응용물리 분야 등이 있으며, 고체와 관련된 분야는 응집물질물리·응용물리·반도체 분야가 있다.
이러한 분야들의 주된 목표는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관찰되는 사물들의 성질을 구명하고, 구명된 성질을 이용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응용하려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에 대한 궁극적 물음의 하나인 생명현상의 구명에까지도 관련하여 탐구되고 있다.
우리의 감각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대상으로는 대기나 해양 또는 지각구조 등 지구에 관한 현상과 더 나아가 천체 및 우주가 있다. 이런 대상들에 대한 관찰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체계적인 탐구는 물리학적 방법이 확립된 이후부터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이러한 방법을 다루는 분야가 지구물리학 및 천체물리학 분야이다.
이와는 반대로 오관으로 감지할 수 없는 미시적인 대상에는 원자핵과 입자들이 있다. 이러한 대상을 다루는 분야가 원자핵물리와 입자물리 분야들이며, 이 분야들의 탐구가 가능하게 되기까지에는 우리 오관의 한계를 더욱 확장해주는 많은 이론적·기술적인 발전이 있어야만 했으며, 이러한 분야의 발전을 바탕으로 물질의 근본 구성요소를 탐구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감각 한계를 넘어서는 대상을 탐구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들의 존재 문제와 관련이 있지만, 물리학에서는 객관화될 수 있는 사실만을 다루기 위하여 길이·시간·질량·전하 등 측정 가능한 양으로 표시할 수 있는 성질들만을 표현하며, 그 표현방법으로 수학을 이용하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한 역사는 매우 길다. 신라시대의 첨성대, 조선시대의 측우기·해시계 등은 아직도 남아있는 탐구의 유물이며, 독창적인 이론들을 전개하였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들은 동양사상의 중요한 한 맥을 이루었다.
그러나 탐구의 결과가 객관화되지 못하고 추상적인 논쟁으로 발전해감에 따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7세기경부터 경험적·실험적인 방법을 중요시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1610년에 허준(許浚)이 완성한 ≪동의보감≫에서는 신체적 경험에 바탕을 둔 매우 폭넓은 관측사실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의학서로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적 지식의 집대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실학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실학운동은 근대과학의 정신과 일치하는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19세기 말 개화기에 도입되기 시작한 서양의 물리학은 우리 나라에서 뿌리내리기에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문과 한글의 문자체계 속에서는 수학적 표현을 능률적으로 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장애와 더불어 이어진 일제의 의도적인 과학교육 억압으로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물리학은 거의 전무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1938년에 이르러 경성제국대학에 물리학과가 설치되었으나 우리 나라 사람은 소수만이 입학되었을 뿐이며, 이 무렵부터 몇몇 일본에 유학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주로 이들에 의하여 광복 후 대학들에 물리학과가 설치되었으며, 1950년대 말부터 박사학위 취득자가 생겨나면서 본격적인 우리 나라의 물리학이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의 물리학은 크게 초창기의 무학위시대, 중반기의 유학 및 구학위제도시대, 1970년대 후반부터의 신학위제도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 따른다면, 초창기 대학 설립에 기여하였던 세대를 제1세대, 이들에 의하여 교육을 받은 후 유학 또는 구학위제도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던 세대를 제2세대, 신학위제도에 의하여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시작한 세대를 제3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물리학의 초창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사람들로는 최규남(崔奎南)·박철재(朴哲在)·권영대(權寧大)를 들 수 있다. 최규남은 우리 나라에 물리학과가 설치되기 이전에 연희전문학교를 나와 미국에 유학하여 미시간 대학에서 1932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는데,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신설과 한국물리학회의 창립,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박철재는 일본 경도(京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광복 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창설과 한국물리학회 창립에 공헌하였고, 그 뒤 원자력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권영대는 일본 북해도대학을 나와 1946년 서울대학교 신설 이후 물리학과의 발전과 한국물리학회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이 세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초창기 물리학자들은 1930년대 말 일제의 대륙침략 시기에 고급기술자의 필요성에 의해 일본의 대학에 진학되었거나 신설된 경성제국대학의 물리학과 출신들이다.
경성제국대학에서는 1946년까지 5명, 동경(東京)제국대학 등 일본의 학부과정 졸업생은 1940년부터 1946년까지 15명 정도가 배출되었다. 이들 약 20여명이 광복 직후 미군정 하에서 대학이 설치될 때 물리학을 전공한 총인원이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1947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1950년부터는 연세대학교 등에서 물리학과 졸업생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되던 물리학계는 그나마 6·25사변으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지만, 1952년 12월 34명의 회원으로 한국물리학회를 발족시켰으며, 휴전 이후 박사학위 취득을 위하여 외국으로 유학을 가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분야별로 물리학이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휴전 이후에 유학생들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기 시작한 1958년 이후이다. 이들의 학위 취득 후 귀국에 힘입어 국내에서의 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학회지의 발간이 이루어지게 되어 1961년 5월에 ≪새물리 New Physics≫를 창간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국내에서도 박사학위를 수여 받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학위가 없던 초창기 물리학자들이 그 대상이었던 바 권영대·한준택·지창렬 등이 그 예이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박사학위제도가 정착되어 갔으며, 이때 정착된 제도가 구학위제도이다. 이러한 구학위제도에 의하여 박사학위를 수여 받은 사람들은 대개 직장 등의 이유로 유학을 가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며, 1970년대 말 신학위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배출되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의 학위 배출로 활성화되던 연구논문 발표를 국제화하기 위하여 1968년 3월에 영문학회지 ≪The Journal of the Korean Physical Society≫를 창간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회활동이 차츰 활성화되어 갔는데, 1971년 국내에서는 한국과학원이 설립되고 국외로는 재미한국인 과학자·기술자협회 등이 결성되면서 좋은 자극제가 되었으며, 연구지원을 위한 한국과학재단이 1976년에 설립된 후 차츰 물리학 연구에 많은 지원이 있어 각 분야별로 연구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신학위제도의 정립은 한국과학원을 시작으로 차츰 각 대학으로 확산되었으며 대학원 정상화와 더불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건 변화에 따라 1980년대에는 각 분야별 논문발표와 학술회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활동들이 가능하게 된 것은 각 분야별 전공인원의 증가와 무관하지 않다. 물리학 전공인원의 증가는 물리학회 회원 수가 1980년 800여명, 1984년 1,900여명, 1988년 2,600여명, 1992년 3,500여명에 이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급격한 회원의 증가는 사회적 배경의 변화에 따라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며, 사회적 배경의 변화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국제적인 영향에서 온 것이다.
국제적인 영향의 직접적 계기로는 국제회의 개최를 들 수 있는데, 1978년 9월 고(故) 이휘소(李輝昭)박사 기념 심포지엄 개최를 시작으로 1982년 서울 국제 반도체 심포지엄, 1985년 제14차 군론에 관한 국제회의 등이 개최되었다. 또한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에는 많은 외국학자들의 방문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90년 여름에는 중국 연변대학에서 남북의 물리학자들이 현대물리 학술토론회에서 만날 수 있었으며, 같은 해 서울에서는 아시아·태평양 물리학 학술회의가 열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국제협력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제화에 힘입어 1993년부터는 영문학회지 ≪Journal of the Korean Physical Society≫가 과학정보기구(ISI)에서 발간하는 SCI에 등록되었으며, 1993년부터의 예비모임을 거쳐 1996년 서울에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APCTP)를 유치하여 이 지역에서의 국제적 역할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99년 현재 우리 나라 물리학계에 정착된 분야로는 입자물리학, 원자핵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 응용물리학, 열 및 통계물리학, 플라즈마, 광학 및 양자전자학, 원자 및 분자물리학, 반도체물리학, 천체물리학, 그리고 물리교육 분야 등이 있다. 각 지역별 지부활동도 활성화되고 있다.
연구활동이 정착되면서 높아진 물리교육에 대한 관심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1983년 3월부터 회지로 ≪물리교육≫이 발간되고 있으며,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기업체나 연구소와 대학간의 학술교류가 빈번해져 이에 대한 협력을 지원하기 위해 1992년부터 ≪물리학과 첨단기술≫이 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박사학위 소지자가 증가하면서 박사 후 과정(post·doc)에 대한 구체적인 시행방안이 마련되고 있으며 이로써 물리학의 연구과정에 대한 제도는 성숙된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리학에서 탐구된 사실들은 인간의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킴은 물론, 그 결과를 이용하여 생활에 유용한 공학적 산물들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문화·경제·국방·교육 등 모든 부문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특히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가치의 문제나 세계관의 문제에도 밀접하게 관련되며, 그 예로서 뉴턴(Newton, I.) 이후 정립되었던 기계론적 세계관과 20세기 초반에 확립된 현대물리학적 세계관이 있다.
17세기에 성립된 기계론적 세계관이 다른 모든 학문분야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며, 이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서양의 과학이 발달하고 그 사회체제와 문명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20세기에 이르러 다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곧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量子力學)의 출현으로 새로운 현대물리학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물리학에 있어서 이 새로운 세계관이 확립된 것은 1920년대의 일이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세계관에 입각한 사회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1985년에 ‘신과학운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서양에서 출발된 새로운 세계관과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동양의 세계관이 많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과학을 통합하는 작업을 시작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통합은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서 제시되는 경우도 있고,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는 방편으로서 마련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환경문제와 같은 복합적 요소들이 뒤섞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을 체계화할 때가 해당되며, 후자의 경우는 정보화 사회의 도래로 인하여 사회의 모든 분야가 변화를 겪는 과정을 일관되게 기술하려 할 때가 해당된다. 어느 경우에나 물리학은 통합적 관점의 제시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환경문제와 관련해서는 핵오염이나 에너지 문제의 해결이 물리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이나 핵융합에 의한 에너지 문제 연구는 매우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핵폐기물의 처리는 처리장에 보관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반감기가 작거나 안정한 핵으로의 변환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와 같은 일은 입자가속기의 이용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 기대되고 있다.
1994년 12월 준공된 포항가속기는 방사광의 이용을 위해 건설되었으나 새로운 가속기의 건설을 위한 좋은 경험이 되었다. 한편 우리 나라의 핵융합 연구는 1995년 말에 성안되어 착수된 ‘차세대 초전도 핵융합 연구장치 개발사업’에서 시작되어 ‘KSTAR’로 이름지어진 토카막 장치의 개발에 집중되고 있는데, 국제적인 핵융합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는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과 더불어 매우 빠르게 구현되고 있는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터넷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WWW(월드 와이드 웹)은 유럽 입자물리 연구소(CERN)에서 개발된 것이다. 앞으로 물리학 연구는 CERN과 같이 국제적인 협력에 의해 이루어져 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바, 인터넷의 등장으로 국가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사회적 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여건 하에서 우리 나라의 물리학은 연구단계에 있어 국제적인 충분한 경쟁력을 갖출 만큼 성장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할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함께 재정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폭넓은 연구인력을 바탕으로 학회활동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하고, 연구능률을 위하여 물리학을 위한 연구소가 설치되어 활발한 연구활동을 할 수 있는 인력을 흡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울러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후세들을 위한 안정된 교육제도의 정립이 절실한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들이 해결되고 주체적인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면 국제적인 수준으로 발돋음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