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태종과 정비(靜妃) 원경왕후(元敬王后)와의 불화를 계기로 원경왕후의 동생들인 민씨 형제가 차례로 화를 당한 사건이다.
정비 원경왕후는 조선 초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을 지낸 민제(閔霽)의 딸로서 태종이 등극할 때까지 여장부로서 명석하게 내조를 잘했다. 그런데 왕위에 등극한 뒤 태종은 잉첩(媵妾 : 곁에서 모시는 시녀)들만 가까이하였다. 이에 원경왕후가 투기를 보이자 불화가 잦아지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이 탄핵을 받게 되었다. 즉, 궁중에 들어가 종친에게 무례할 뿐 아니라 종친간에 이간을 꾀하였다는 혐의로 개국 · 정사(定社) · 좌명(佐命) 등 삼공신의 탄핵을 받게 된 것이다.
1407년(태종 7) 가을 삼공신이 모여 민무구 · 무질(無疾) 형제를 논죄할 때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박은(朴訔)이 병으로 불참하자 대간(臺諫)은 박은을 민무구 형제의 당이라고 지적하면서 잡아 가둘 정도였다. 그러나 박은은 곧 석방되었다.
다음 해 간관들이 대사헌 박은과 장령(掌令) 신간(申僩)에게 민무구 형제의 논죄를 천연시켰다는 이유로 죄줄 것을 청하자, 태종은 노해 신간을 귀양보내고 박은을 좌천시켰을 뿐 민무구 형제의 논죄는 거론하지 않았다. 이것은 장인인 민제의 후덕함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제가 죽자 1409년 정부 및 삼공신들이 민무구 · 무질 형제를 비롯해 여당인 이무(李茂) · 윤목(尹穆) · 유기(柳沂) · 조희민(趙希閔) · 이빈(李彬) · 강사덕(姜思德) 등의 처형을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에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해도(海島)에 부처(付處)하게 하고, 나머지 죄인에 대해서도 주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 뒤 1410년 태종은 종친과 정부의 강력한 주청에 따라 민무구 · 무질 형제를 자진(自盡)하도록 하였다. 얼마 뒤 민무휼(閔無恤) · 민무회(閔無悔)가 누이인 원경왕후가 병환으로 눕게 되자 문안차 입궐하였다가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에게 두 형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정가에 전파되어 국문을 받은 뒤 원지로 부처되었다.
그 뒤 1416년 정부의 강력한 주청으로 민무휼 · 무회 형제도 사사되고 처자들은 먼 지방에 안치됨으로써 여러 해 동안 끌었던 민씨 형제에 관한 옥사가 끝이 났다. 이 옥을 계기로 민제의 4형제는 외척의 몸이 된 것이 화근이 되어 오히려 비참한 희생을 당하였다. 이들이 숙청당하게 된 것은 태종의 왕권 강화책과 무관하지 않다.
즉 외척 세력의 대두를 억압하기 위한 경종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옥은 또한 태종과 원경왕후의 불화가 사건 자체를 확대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고 고려구가세족(高麗舊家世族) 등의 관계로 얽혀서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 격렬한 정치 파동을 일으켰던 큰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