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종례(宗禮), 호는 운촌(雲村) 또는 운곡(雲谷). 민구손(閔龜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 민제인(閔齊仁)이고, 아버지는 군수 민사용(閔思容)이며, 어머니는 김승(金昇)의 딸이다. 참판 민여임(閔汝任)의 아우다.
1613년(광해군 5)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박사·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으나 권신과의 불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곽산군수(郭山郡守)를 지내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선두에 서서 선봉장 박영서(朴永緖), 평안감사 이상길(李尙吉), 삭주부사 민인길(閔仁佶) 등과 함께 활발히 활약하여 황주·삭주 등지에서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뒤에 도리어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곧, 울산부사로 복직되었으나 이때 조정에서 시행한 호패법(號牌法)의 명부를 기일 내에 작성하지 못한 죄로 서울로 소환되는 도중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모든 요새가 연이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국충정에서 고심하다가 괴산에서 병사하였다. 요인요사(料人料事)에 뛰어나고 성행이 청고하였으며, 충심이 높고 치적이 우수하여 품복(品服)을 특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