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안(務安). 1010년(현종 1)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공부시랑(工部侍郞)로 있었는데, 거란병이 침입하여 청수강(淸水江: 지금의 淸川江)에 이르자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므로 주민이 모두 흩어졌다.
다음 해 안북(安北)으로부터 개경에 돌아와서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인 무안현으로 돌아가던 중, 거란의 침입으로 피난길에 오른 왕의 행차를 만나 나주(羅州)까지 따라갔다.
얼마 뒤 왕에게 하직을 고하고 무안으로 돌아갔다가 거란군사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서 왕을 알현하자, 왕이 사재경에 임명하므로 당시 여론이 그를 비난하였다. 사재경(司宰卿)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장작감(將作監)이 되었으며, 뒤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올랐다.
거란침입 때에 왕을 호종한 공로가 현저하고 개경을 수복하는 동안 변함없는 절개로 사직을 안정시켰다 하여 1052년(문종 6) 공신각 상에 도형(圖形)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