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로(重老), 호는 의곡(義谷) · 응천(應川). 할아버지는 박이(朴苡)이고, 아버지는 참찬 박호원(朴好元)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김명윤(金明胤)의 딸이다. 이산해(李山海)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주서(注書)로 임금과 함께 서쪽으로 피난갈 때에 사관 조존세(趙存世) · 임취정(任就正) 등과 함께 선조가 즉위하던 해인 1567년부터 1591년까지 25년간의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안주에서 도망쳐, 이로 인하여 계속 탄핵을 받았다. 1601년 정월 예조좌랑이 되어, 3월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첫머리에 의망되었으나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친 일로 선조의 비판을 받아 마침내 배제되었다. 1616년(광해군 8)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618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상사(上使) 신식(申湜)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공조참판을 지내고, 1625년(인조 3) 사은사 겸 진위사(謝恩使兼陳尉使)로 부사 정운호(鄭雲湖), 서장관 남궁경(南宮檠) 등과 함께 다시 명나라로 가려고 할 때 도중에 도망칠 염려가 있으니 가지 못하게 하라는 탄핵을 받았으나 인조의 신임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1627년 3월 무과의 시관(試官)이 되고, 1632년 형조판서 ·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박승종(朴承宗)의 족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