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일본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발해 음악 및 중국 송나라와 금나라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발해 음악을 발해악이라고 역사서에서 기록하였다.
발해 음악 분야를 관장하였던 왕립 음악기관이 바로 태상시였는데, 태상시는 예의(禮儀)와 제사를 관장하였던 의부(義部)의 한 산하기관이었다. 즉, 이 음악기관은 신라의 음성서(音聲署)처럼 악공·악사·교방여기들을 거느리고 궁중의식이나 잔치 때 연주하는 기악·성악·무용, 곧 악가무(樂歌舞)를 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속일본기 續日本紀≫ 권13에는 740년 일본 궁중에서 발해 사신 기진몽(己珍蒙)을 위한 환영잔치 때 발해악이 연주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권17에는 749년 발해악이 당악(唐樂)·오악(吳樂)과 함께 일본 궁중에서 연주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발해악은 일본 조정에 파견되었던 발해 악사와 악생에 의해서 연주된 음악이 아니었고, 실제로는 아악료(雅樂寮) 소속의 고구려의 음악인 곧 고려악사(高麗樂師)와 악생들이 연주한 고려악(高麗樂)이었다.
이렇게 실제로 연주된 고려악을 ≪속일본기≫에서 발해악이라고 기록한 것은, 첫째 고구려는 668년에 이미 멸망하여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둘째 8세기 당시 발해의 신하나 일본 조정의 중신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같은 뿌리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발해악은 일본의 인명왕(仁明王) 당시 아악료의 악제개편 때 고려악·백제악·신라악과 함께 우방(右坊)의 고려악이라는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발해악은 삼국악(三國樂)의 경우와 다르게 실제로는 고려 악사와 고려 악생들에 의해서 전승되었으며, 또 악가무로 편성되었던 것 같다.
한편 발해금(渤海琴)과 발해악이 송나라 궁중에서 연주되었다는 ≪송사 宋史≫ 권35 및 권131의 기록이나, 발해악과 발해교방(渤海敎坊)이 금나라 명창연간(明昌年間:1190∼1195)에 연주되었다는 ≪금사 金史≫ 권39의 기록이 있다. 이는 모두 발해의 태상시에서 연주되었던 발해악의 전통이 발해 멸망 뒤 발해의 악공·악사·교방여기의 후예들에 의해서 단편적이나마 송나라와 금나라의 궁중에서 명맥을 이어왔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