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온양(溫陽). 1514년(중종 9)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520년 부령부사가 되었다. 1522년 만포첨사가 되었으나 곧 체임되고, 1524년 정평부사가 되었다.
1525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왜구(倭寇)들을 잡은 공으로 상을 받았으나, 왜적이 삼도(三島)에 와서 약탈을 할 때 7일 동안이나 삼도에 머물면서 진(鎭)을 비우는 등 방어에 소홀했다 하여 곧 탄핵을 받고 비인(庇仁)에 유배당하였다.
다시 회령부사를 거쳐 1536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1540년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1542년 충주목사를 역임하였으나 이듬해 탄핵을 받고 체임되었으며, 1544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이어 가덕도축성사(加德島築城使)가 되어 왜구의 방어에 힘썼다.
1545년(명종 즉위년)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고, 1549년 첨지(僉知)에 이어 1551년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554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1556년 청홍도병마절도사(淸洪道兵馬節度使)로서 왜구의 방어에 힘썼다. 문인이었으나 무재(武才)에 뛰어나 젊어서부터 왜구의 방어를 위해 외방에 나가 노력하였으나 도중에 방어를 허술히 했다는 것과 논상(論賞)을 둘러싸고 많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