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 좌통례(左通禮) 배이순(裵以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배헌(裵獻)이고, 아버지는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 배천석(裵天錫)이다.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정세호(鄭世豪)의 딸이다. 안동에서 세거했으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이 되고, 156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學諭)·학록(學錄)·학정(學正)·박사를 거쳐 호조좌랑이 되었다. 1575년(선조 8)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정랑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외직인 풍기군수와 양양부사를 지내고, 1583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다. 뒤에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헌납 겸 춘추관기주관(司憲府獻納兼春秋館記注官) 등을 역임하였다.
1585년 겨울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었고 이후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으며, 1587년에는 진사사(陳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 해 황해도에 흉년이 들자,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해도관찰사로 구황에 힘쓰다 병이 깊어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대성(臺省)에 있으면서 같은 성씨끼리의 혼인을 금할 것을 주청해 조정에서 한때 찬반론이 격렬해지기도 하였다. 황해도관찰사 시절에는 병든 몸을 위해 올리는 쇠고기를 금육(禁肉)이라 하여 끝내 사양하는 강직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외직에 있으면서 특히 석채(釋菜: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석전제) 등의 제사를 지내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는데, 배삼익이 지내는 기우제에 곧잘 효험이 나타났었다. 장서가로 후세까지 이름을 남겼으며, 필법이 힘찼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임연재선생문집(臨淵齋先生文集)』 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