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이헌(而獻). 백인영(白仁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백유징(白惟澄)이고, 아버지는 백수종(白守宗)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이희득(李希得)의 딸이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제용감참봉이 되었다가 11월에 파직되었다. 159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0년 북도평사(北道評事), 1601년 공조좌랑, 다음 해 7월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04년 감찰·황해도도사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호조정랑, 1611년 희천군수가 되었다. 일찍이 정인홍(鄭仁弘)의 문객이 되어 이로 인하여 탁용되었다.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천거로 형조정랑에 임명되었고, 북청판관(北靑判官)을 지냈다. 1616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이이첨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해주목사 최기를 남형죄로 투옥하여 옥사하게 하였다. 1617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사헌부에서 천성이 음패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1618년 형조참의에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다.
이이첨의 심복으로 한찬남(韓纘男) 등과 폐모론의 주동이 되었고, 또 1622년 섣달 그믐날 귀신쫓는 굿을 핑계로 인목대비를 살해하려 계획하고 이위경(李偉卿)과 함께 서궁인 경운궁으로 들어가 일을 도모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이귀(李貴)에게 한찬남·이위경·정몽필(鄭夢弼) 등과 함께 붙잡혀 참수당하였다. 이이첨의 권세가 높아지자, 그의 뜻에 맞추어 허균(許筠)과 함께 폐모론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로 크게 활약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