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은 백제가 멸망한 뒤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왕족의 후예들이 그들의 씨족사찰로서 창건하였다.
당시 중요한 당우로는 남대문(南大門)·중문(中門)·금당(金堂)·강당(講堂) 등이 있었고, 금당 앞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탑이 있었으며, 또 회랑(廻廊) 등도 아울러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사적공원으로 지정이 되어 있으나 완전히 폐사가 되어 그 흔적만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찰을 건립한 백제왕씨(百濟王氏)는 다른 한국의 이주민들과는 달리 일본정부에서는 특별히 우대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높은 지위를 얻어 상류계층의 귀족에 준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 까닭은 간무왕[桓武王]이 즉위하자 그의 생모인 다카노[高野新笠]가 백제무령왕의 후손인 야마토씨[和史氏]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왕들은 자신의 외척이 되는 이들 백제왕의 후손들을 우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