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역은 고양시에 있었는데,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벽제역의 객사에 유숙하였다. 그리하여 벽제역의 객사를 곧 벽제관이라 하였다.
벽제관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조선 세종대에 크게 개축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정이오(鄭以吾)의 기(記)에 의하면 “1426년(세종 8) 8월에 현감 하부(河傅)와 감사 심도원(沈道源)의 노력으로 허물어진 공관(公館)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428년 11월에 공사를 마무리하였는데, 당시 벽제관에는 동헌(東軒)과 서헌(西軒), 문묘(文廟), 남별관(南別館)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벽제역은 고려시대에는 청교도(靑郊道:驛道의 하나)에 속한 벽지역(碧池驛)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벽제역(碧蹄驛)으로 바뀌었다.
벽제역의 관할은 세종대에는 우도정역찰방(右道程驛察訪), 세조대에는 영서도(迎曙道)의 찰방의 관리 아래 있었으며, 따라서 벽제관은 결국 중국사신을 영송하는 중요한 역로상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