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초명은 변계문(卞季文), 자는 일민(一敏). 변경(卞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변빈(卞贇)이고, 아버지는 판윤(判尹) 변남룡(卞南龍)이며, 어머니는 영문하부사 염제신(廉悌臣)의 딸이다.
1414년(태종 14) 알성 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 내외직을 지낸 뒤 직제학을 거쳐 1428년(세종 10)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을 지냈다.
1439년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를 거쳐 그 이듬해 첨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이전에 회령대후(會寧待候)로 재직시에 귀화한 여진인들의 의복지급사건에서 죄를 지은 사실로 의금부·사헌부 등의 탄핵을 받아 1441년 파직되었다. 1443년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나, 태종 때의 죄인이었던 이속(李續)의 손자인 이인휴(李仁畦)를 통신사 수행시 대동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1446년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거쳐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이전에 훈련제조(訓鍊提調) 재직 때에 아들 변이흠(卞李欽)의 무과시험에서 감찰(監察)에게 청탁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직산(稷山)으로 장류(杖流: 장형을 받고 유배당함)되었다.
1454년(단종 2) 다시 중추원부사를 거쳐 경주부윤·전주부윤을 역임하였으나, 1458년(세조 4) 전주부윤 재직 중 축재한 죄로 파직되었다. 1444년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였고, 앞서 최치운(崔致雲)·이세형(李世衡)·김황(金滉) 등과 함께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