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20.5㎝, 입지름 5.0㎝, 밑지름 8.3㎝.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분청사기는 고려 말 14세기 후반을 시발점으로 하여 조선시대 16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간 제작된 조선 전기의 독특한 도자기이다. 백자와 더불어 세종 연간에 두드러지게 발전하여 특히 1460년대에 절정기에 달했다.
이 편병은 구연이 밖으로 벌어졌으며 목이 긴 편으로 구형(球形)의 동체 앞뒷면을 편평하게 두드려 만든 편병이다. 굽은 약간 떨어진 다리굽에 안바닥이 얕고 안정감을 준다.
목과 저부까지 백토를 짙게 입힌 후 그 위에 예리한 도구로 선각한 연당초문이 앞뒷면에 대담하게 추상화되어 시문되어 있다. 양측면에는 각각 수양버들이, 어깨에는 연판문이 중첩되어 새겨져 있다. 주문양인 연당초문은 광주 무등산 충효동가마에서 발굴된 분청사기 제기에 선각된 조화문과도 매우 비슷하다.
이 편병의 태토(胎土)는 녹갈색으로 백토분장과 강한 대비를 이루고 유층이 고르지 않아 군데군데 뭉친 부분이 있으며 몇 군데 유(釉)가 깎여 떨어져 나가고 긁힌 부분이 있다. 굽 안바닥에도 유약이 뭉쳐져 녹색이 짙으며, 받침자국인 내화토 덩어리가 붙어 있다.
분청의 여러 문양 가운데 조화문의 경우 세종 때 훌륭한 예들이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데, 그러한 작품으로 고봉화상(高峯和尙)의 사리호(舍利壺)인 분청조화박지철채연어문골항아리가 있다. 이 사리호는 송광사(松廣寺) 고봉화상 부도(浮屠) 안에 다시 매장되어 현재는 볼 수 없으나 사진으로나마 전해오므로 양식 파악에 도움이 된다. 고봉화상은 1428년(세종 10)에 입적하여 1430년 사리호가 매장되었으므로 이 사리호의 제작 연대는 대체로 1428∼1430년 사이가 될 것이다. 조화박지 분청의 편년자료로는 이 사리호가 최초의 것이므로 양식 비교와 연대 추정에 좋은 기준작이 된다.
이 편병을 고봉화상의 사리호와 비교해 볼 때 사실적인 문양이 거침없이 표현된 사리호에 비하여 편병의 문양은 매우 추상화되고 시문 수법 또한 한층 간결하고 노련하다. 따라서 이 편병은 분청사기가 세련되어 가는 1440년대나 1450년대의 작품이 아닐까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