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文宗) 때에는 양온서(良醞署)라 칭하였고, 뒤에 장례서(掌醴署)라 하였다.
1098년(숙종 3)에 다시 양온서라 개칭하였고, 1279년(충렬왕 5)에 선송주색(宣送酒色)을 파하여 본서(本署)에 병합하였다가, 1308년에 충선왕(忠宣王)이 고쳐 사온서(司醞署)라 하여 제점(提點, 정5품) 3인이 겸관, 영(令, 정5품) 2인중 1인 겸관, 승(丞, 정6품) 2인 중 1인 겸관, 직장(直長, 정7품) 1인, 부직장(副直長, 정8품) 1인을 두었다.
뒤에 제점을 파하고 영을 낮추어 정6품으로, 승을 정9품으로 하고, 직장·부직장은 그대로 두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양온서라 칭하다가 1362년에 사온서로, 1369년에 양온서라 고쳤으며, 1372년에 다시 사온서가 되었다.
충선왕의 집정체제(執政體制)에서의 사온서는 술·감주류를 공급하였는데 이는 양온서의 초기의 직능과는 심한 차이가 있으며, 또한 공민왕(恭愍王) 5년의 개혁은 외형상 문종 관제의 복구이지만 내용면에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온서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존속되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종5품아문(從五品衙門)으로 계승되었다. → 양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