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인 하연(河演)이 1421년(세종 3)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관내를 순시하던 도중 고산면에 들렀다가 현재의 삼기리로 소풍을 나갔는데, 이 때 그곳의 냇물 · 돌 · 소나무 등이 한데 어 울려 한폭의 그림 같은 경관을 이룬 것을 보고 마음이 쏠려 ‘세가지 기이하다’는 뜻으로 삼기(三奇)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다.
이에 고산현감이었던 최득지(崔得之)가 정자를 세우고 하연에게서 기문을 받아 ‘삼기정’이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1875년(고종 12)최득지의 후손들이 정자의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으며, 기우만(奇宇萬)이 비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