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충주(忠州). 좌찬성(左贊成) 석여명(石汝明)의 아들이다. 1364년(공민왕 1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있을 때, 왜구가 착량(窄梁: 지금의 경기도 수원 지방)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이를 물리쳐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돈(辛旽)의 무고(誣告)로 장암(長巖: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지방)에 유배되고 가산(家産)은 몰수되었다. 뒤에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으며, 1377년(우왕 3) 왜구가 수안(守安: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통진(通津: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동성(童城: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최영(崔瑩) 등과 함께 원수(元帥)로 출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