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씨부인 신경준 선생유지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신말주(申末周)와 부인 설씨부인(薛氏夫人)을 비롯하여 신말주의 10세손 신경준 등 후손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 위치한다. 이곳은 일명 귀래정(歸來亭) 신말주 후손 세거지로 알려져 있으며,1994년 8월 10일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설씨부인(1429∼1508)의 본관은 옥천(玉川)이다. 설백민(薛佰民)의 딸로 이곳에서 태어났고, 후에 귀래정 신말주와 혼인하였다. 신말주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세조대 훈신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이다. 1416년(세조 2)에 벼슬을 버리고 부인과 함께 순창의 처가로 낙향했다. 이후 이들의 후손이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다.
설씨부인은 문장과 서화에 능하였다. 1482년(성종 13)에 강천사 불사(佛事)를 위해 쓴 설씨부인 권선문첩(보물, 1981년 지정)과 강천사를 그린 채화(彩畵) 14첩이 전해진다. 신말주의 후손인 신경준도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1712년(숙종 38) 신래(申淶)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순민(舜民)이고, 호는 여암(旅菴)이다.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학덕이 높았다. 26세가 되던 해인 1741년(영조 17) 소사(素沙)로 이사해 순창을 떠났다.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에 급제한 뒤 휘릉 별검(徽陵別檢)을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1770년(영조 46)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다. 이 때 영조는 8명의 문사를 뽑아 『문헌비고(文獻備考)』의 편찬을 명했다. 그는 여기에 뽑혀 『여지고(輿地考)』의 편찬을 맡았다.
그 뒤 내외직을 두루 거쳐 제주목사를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1779년(정조 3) 고향인 이곳 순창 남산대 옛집으로 돌아와 지냈다. 1781년(정조 5)에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경준은 문신으로서보다는 지리학과 언어학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이름이 높다. 그는 『강계지(疆界志)』 · 『의표도(依表圖)』 · 『도로고(道路考)』 · 『산경표(山經表)』 ·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유집으로 『여암집(旅菴集)』이 있다.
이곳은 신말주와 부인 설씨부인을 비롯하여 신경준 등 그의 후손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남산대 일원의 유지(遺址)로, 면적1,074㎡이다. 1996년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외삼문인 일관문(一貫門)을 들어서면 왼편에 만재 고령신공당식 공적비(晩哉高靈申公瑭植功績碑)와 오천(梧川) 신익휴(申翼休)공 공적비가 있다. 안채로 통하는 여견문(如見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혜당(慈惠堂)를 비롯하여 우측에는 남애정사(南厓精舍), 좌측에는 사당인 남산사(南山祠), 남산사창건기(南山祠創建記)의 비가 있다.
한편 유장각(遺藏閣)에는 문화유산이 보관되어 있는데, 정면에 귀래정연혁비(歸來亭沿革碑)가 세워져 있고, 유장각 우측 편에는 충서당(忠恕堂)이 있으며, 충서당 뒤쪽에는 귀래정(歸來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