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 때에 성(城)을 쌓는 데 있어서 분담맡은 구간의 공역을 책임 기술자이다. 이 이름은 남산신성비 제1비(591)에만 보인다. 곧 성사상은 남산신성 제1비에 보이는 아량촌(阿良村)·아량몰(阿良沒)·노함촌(奴含村) 등 세 개 지역 가운데 아량몰에서 파견된 축성 책임자로서, 남산신성 제2비와 제3비의 작상인(作上人)과 동일한 성격의 존재였다.
아마도 이는 성사상인(城使上人)으로도 일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상인이란 남산신성비에 보이는 일반적인 용례로 보아 해당 작업의 책임자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성사상 또는 작상인이란 그 출신지역의 장척(匠尺)·문척(文尺)·면착상인(面捉上人)·석착상인(石捉上人) 등을 거느리고 부여된 축성 작업을 지휘 감독하여 진행하는 책임자로 믿어진다.
또한 성사상은 명활산성작성비(551)에 보이는 공인(工人) 곧 재지사회의 유력자로서 재지 장인집단을 거느리고 직접 수작거리(受作距離)를 부여받는 기술적 책임자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 578) 단계에서 대공척(大工尺) 등으로 불리웠다가, 남산신성비의 단계에 이르러 이 이름으로 일컫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본래 재지사회의 유력자였다가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어떤 이들은 군상촌주로, 그리고 남산신성비의 성사상과 같은 존재는 기존의 재지사회의 지위를 유지함으로써 그에게 속한 장인들을 거느리고 축성 등에 있어서 기술적 책임을 졌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