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옛 정의(旌義: 지금의 성읍) 고을의 관원(官員)들이 숙식하였던 곳으로, 18세기말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안채(안거리)와 바깥채(밖거리)는 1979년에 보수하였다.
마당의 서쪽에 있던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놓인 집채)’는 1970년대 중반에 헐렸다. 이 가옥은 성읍마을의 남문(南門)길 서쪽에 위치하여 남향(南向)하고 있다.
남문길에 접한 곳의 좌측에 대문간(이문간)이 있고, 우측에 모커리가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좌측에 북향(北向)인 바깥채가 있고, 우측에 남향인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배치형태는 ㅛ형을 취하고 있으며, 안채 뒤에는 오랜 수령을 자랑하는 동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바깥채 뒤에는 텃밭(우영)이 일구어져 있다.
대문간의 맞은 쪽 길 건너에는 식수를 공급하던 이른바 ‘남문통’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우물물은 옛 고을의 관원들만이 마실 수 있는 식수로, 이 집이 예전 관원들의 숙식처였음을 입증하여 준다.
1970년대 초 고평오가 혼인을 하면서 ‘고팡물림(부모가 혼인한 아들에게 안채를 물려주고 바깥채에서 기거하는 의례, 제주도에서는 장남이라도 분가를 원칙으로 삼는다)’이 있었는데, 그 당시 한 울타리 안에서 독립된 가구형태를 취하기 위하여 변소를 모커리 남쪽과 바깥채 뒤쪽의 2개소에 두었다고 한다. 대문간은 문을 달지 않고 담을 터놓은 트임문으로 하였다.
안채는 3칸으로 중앙에 대청마루(상방)가 있고 대청마루 좌측에는 앞뒤에 안방(큰구들)과 고방(고팡)이, 우측에는 부엌(정지)이 배치되어 있다. 안채에는 ‘굴묵(방의 난방을 위하여 불을 때는 곳)’이 있으며, 부엌에는 돌을 네모지게 둘러서 불을 피우는 ‘부섭(봉덕 · 화덕)’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1979년 보수할 때 없애버렸다고 한다.
대청마루와 안방 전면에 설치된 툇마루(난간)의 상부에는 서까래와 연결시킨 ‘풍채(비바람이 칠 때 내려서 비바람을 막고, 볕이 날 때 올려서 땡볕이 방에 드는 것을 막는 시설물)’가 달려 있다.
바깥채는 예전 면사무소의 관원들이 숙식하였던 곳으로 제주도의 여느 집 평면구성과는 달리 대청마루가 중앙에 위치하지 않고 동쪽에 치우쳐 있으며, 대청마루에 연접하여 2칸의 골방이 배설되어 있다. 모커리는 수렛간과 ‘남방애(통나무로 만들어진 제주도 특유의 절구)’ 등을 보관하는 헛간 및 외양간(쉐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은 보수할 때 개조된 모르타르로 마감한 기단을 제외한 모든 구조들이 평범한 제주도 민가양식에 따르고 있다. 이 집은 제주도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호령창(생깃문: 상방 앞에 설치된 작은 쌍여닫이널문)’이 있으며, 관원숙소였던 바깥채의 평면구성이 이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