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 박동기는 1907년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마을에서 태어나 청송소학교를 마치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경영하는 대구보통성경학교 단기과정을 수료한 뒤 전도사 활동을 하였다.
성경학교를 다닐 때인 1928년 1월에 15일간 단식을 하면서 중생은혜(重生恩惠)의 종교체험을 하였다고 하며, 1936년부터 3년 동안 포항장로교회에서 전도사업을 하며 신사참배에 대한 설교를 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청송군에 있는 매산(梅山) 산속에 피신하였다.
1940년 11월 29일 피신처에서 기도를 드리던 중, ‘갑자기 하늘문이 열리고 십자가의 영광이 밝은 빛을 발하더니 쉬하는 강한 바람소리가 들리며 부활승천하셨던 주께서 친히 성체(聖體)로 나타나셨다.’는 체험을 하고 계속된 종교경험에 힘입어 나라의 독립과 지상천국건설을 목적으로 교단을 만들게 되었다.
경상북도 청송·영일·영천군의 경계인 보현산(普賢山)에 신도들을 집결시키고 일제와 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으로 정치기구조직을 만들게 되었다면서 내각을 발표하였다. 자신은 태평왕지상대리(泰平王地上代理), 전권총리(全權總理) 채병하(蔡炳夏), 내무대신 정운훈(鄭雲薰) 등 6대신과 일본총독·육해공군 사령관 등도 임명되었다.
그들은 왜경의 눈을 피해 다니면서 <성삼위 통역책> 등 29권의 프린트본과 팸플릿을 만들었으며, 자신들의 교단만이 마지막 환란의 날에 하나님이 세우신 진정한 교회이며, 자신들이 받은 ‘매산은혜(梅山恩惠)’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일체의 구원도 없다고 주장했다.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고 죽은 자가 부활하며 신도들은 공중으로 향해 올라갈 것이라는 예언 하에, 1944년 7월 7일의 날짜가 선정되었으나 예언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1945년 5월에는 신도 33명과 함께 체포되어 고초를 당했다. 해방 후에는 태극기의 음양원리가 성경에 위배된다고 하여 음양신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뒤 교주의 예언과 지시가 번번이 빗나가게 되자 신도들이 동요하였고, 교주의 지나치게 주관적인 성경 해석 때문에 간부들도 불만을 품게 되어, 한 때 교주 박동기를 따르는 파와 시온산예수장로회의 황유하(黃維河)파, 그리고 대림동의 서석윤(徐錫潤)파로 나뉘어 활동하였으나, 1985년에 노회와 지교회를 조직하여 체계화하였으며, 현재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 소재를 두고 있는 시온산예수장로회독노회만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