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만정(曼情), 호는 주촌(舟村). 본관은 평산(平山). 영의정 신흠(申欽)의 증손이다. 시직(侍直) 신익륭(申翊隆)의 아들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굴욕적인 강화(講和)로 끝나게 되자 당시 회덕(懷德)에 있던 송시열을 찾아가 학업에 정진하였다.
1658년(효종 9) 송시열이 다시 등용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논의할 때 그의 요청으로 조정에 들어가 이에 관한 의견을 내놓아 반영시켰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의 계획은 와해되고 말았다. 1665년(현종 6) 원자(元子)의 탄생으로 경과(慶科)가 설치되자 송시열의 지시로 이를 비난함으로써 남인(南人)과 논쟁을 벌였으나 마침내 송시열이 우찬성(右贊成)에서 사직하자 낙향하였다.
그는 학문에도 뛰어나 어려서 신동(神童)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낙향한 후 벽촌(僻村)의 빈민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로 급질(急疾)을 치료할 수 있도록 『주촌신방(舟村新方)』이라는 의서를 편찬하여 보급하였다. 시호는 효의(孝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