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신송(申松). 다인현(多仁縣: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출신. 다인현 벌리역(伐里驛)의 역리(驛吏)로 있다가 원나라에 들어가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종자(從者)가 되어 총애를 받았다. 충숙왕(忠肅王) 때 산원(散員)과 호군(護軍)을 거쳐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왕이 정사를 게을리하자 박청(朴靑)·이청(李靑)과 더불어 권세를 남용하여 당시 사람들이 삼청(三靑)이라 불렀다.
또 충숙왕이 아들 충혜왕(忠惠王)과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순군천호(巡軍千戶)로서 충혜왕의 측근자인 송팔랑(宋八郎)과 홍장(洪莊) 등을 순군부(巡軍府)에 가두고 심한 고문을 하여 충혜왕의 미움을 받았다.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권성(權省)·홍빈(洪彬) 등에 의하여 이문소(理問所)에 갇히고, 다시 기로부원군(耆老府院君) 권부(權溥) 등이 7가지 죄목을 들어 행성(行省)에 죄줄 것을 주장하여 순군부에 옮겨졌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한 뒤 다시 등용되어 1356년(공민왕 5)에 평양도순문사(平壤道巡問使)를 역임하고 계속 벼슬이 올라 공부상서(工部尙書)를 거쳐 이듬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제수되었다.